[경기시론] 무술년 추구하고 싶은 구도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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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2월16일이 돼서야 정식 무술년이다. 그 날은 달이 지구와 태양 사이에 위치하는 날(삭)을 기준으로 삼은 음력으로 새해 첫날, 설이다. 전에는 계속 길어지던 밤이 마침내 줄어들기 시작하는 동지를 새해의 첫날로 삼기도 했다.

 

그에 반해 양력 1월1일은 왜 그 날이 새해 첫 달의 첫 날인지 기준이 좀 막연하다. 서기(西紀)는 예수님이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태어나신 날, 즉 12월25일(크리스마스)을 새 시작의 날로 정하는 게 마땅해 보인다.

 

실제로 영국과 독일, 스위스, 스페인 등에서는 16세기까지 그러기도 하였다. 그리고 1691년 교황 이노첸시오(Innocentius) 12세가 오늘날의 1월1일을 새해 첫날로 정했다.

 

이유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그 날이 예수님이 할례 받으신 날(circumcisio)이다. 아무튼 현재로서는 이슬람교와 불교를 국교로 삼는 나라들과 그 외 몇 나라 빼고는 이 날을 새해의 첫날로 삼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물론 이 날을 공식 첫 날로 삼더라도 아직 전통의 설을 민속 명절로 삼는 나라들도 많다.

 

우리는 왜 시작을 중시하여 한 주, 한 달, 한 해, 한 세기의 시작에 큰 의미를 둘까? 곰곰 생각하니 예배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예배란 아무 때고 자주 드리는 게 좋겠지만, 적어도 정해진 하루, 주일만큼은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와 묶여 있다.

 

예배의 순간에는 감히 하나님 눈이라고 하진 못하더라도 가능한 나를 벗어나 하나님 향한 눈으로 나를, 지난 한 주를 되돌아본다. 얼마나 오만하며 교만하고 태만하였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그에 대해 회개하고 약속 삼아 다짐한다. 다음 새로 시작되는 주의 월요일부터는 하나님 기준에 좀 더 마땅한 쪽으로 다잡아 살겠다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 ‘작심삼일’이다. 사실 주마다, 예배마다 하는 다짐들이 다 이루어졌다면 이미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공자님도 70이 되어서야 이루었다는 수준,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수준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지 못한 현실로 보아 역시 작심삼일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그럴 바엔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느냐? 작심삼일이란 말을 쓰는 사람이 내비치고 싶은 속내이겠다. 그러나 그 작심삼일이 모여 오늘날의 우리가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조차 하지 않았다면 더 형편없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작심삼일을 장려할 마음은 없다. 다만 그런 다짐이 쌓이고 쌓이면 불혹에 지천명 그리고 이순(耳順)의 수준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그 정도에 이르면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처럼 보이지 않을까.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 바로 아는 것을 도통(道通)한다고 한다. 산다는 것은 옳은 일을 찾아가려는 부단한 노력의 과정이다. 옳은 길을 정도라고 한다면, 큰 길은 대도라고 한다. 인생의 옳은 길, 큰 길을 바로 걸어간 어른들을 우리는 인생의 스승이라고 일컫는다.

 

석가나 예수 그리스도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이 분들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결코 살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따라서 무술년에는 우리도 구태 한 마음 벗어던지고 바른 길 정도에 길로 구도자(求道者)의 삶을 추구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김근홍 강남대학교 교수·한국노년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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