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론] 영혼 있는 공무원

▲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의 소설 ‘25시’를 원작으로 만든 옛날영화가 있다. 영화 제목도 같은 ‘25시’인데 1967년도에 제작되고 안소니 퀸과 비르나 리지가 주연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 희생된 부부의 얄궂은 운명을 다룬 명작이다.

 

마지막 장면에 안소니 퀸의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연기가 압권이었는데 나는 좀 다른 장면에 주시하게 됐다. 독일군에 끌려간 남편의 행방을 찾고자 공무원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비르나 리지가 하소연하는 장면이다.

 

그 공무원은 열심히 종이에 메모하면서 여자의 청원에 관심 있는 척하지만, 사실은 그림낙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원인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딴짓하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 오늘의 현실과 오버랩 됐다.

 

‘영혼 없는 공무원’은 현대 사회학의 태두 막스 베버가 관료조직을 비판하면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막스 베버는 이런 식의 말을 한 적이 없다. 베버가 주목한 건 관료의 신분보장과 전문성이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건 잘릴 걱정 없이 소신껏 일해야 국민이 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버의 바람일 뿐 우리는 남의 나라 얘기였다.

 

고위 공무원 스스로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라고 말할 지경이니 대다수 공무원은 침묵이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나라인 미국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 FBI 코미 국장에게 충성을 요구했다고 하나 코미는 영혼을 팔지 않았다. 매우 드문 경우다. 대다수 고위 공무원들은 트럼프의 말에 영혼을 다 바쳐 충성하고 있다.

 

최근에 그만둔 고위 공무원은 후배 공무원들에게 ‘영혼이 있네 없네 고민하지 말고 드러나지 않게 알아서 기어라’고 조언한다. 정권을 7번이나 겪었으니 나름대로 사는 길을 알려준 것인데 어쩐지 씁쓸하다.

 

위법한 상관의 지시나 명령을 거부해도 인사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이 지난 3월20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영혼 있는 공무원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좀 미안한 얘기지만 ‘공무원은 영혼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열심히 공부하면 명문대 간다’거나 ‘운동하면 살 빠진다’와 같은 뻔한 소리다.

 

정권을 담당하는 사람과 장차관만 제대로 하면 공무원은 영혼백배 뛸 사람들이다. 박근혜 정권의 영혼 없는 드라마를 펼친 주역은 청와대와 장차관과 신분보장이 안 되는 1급 공무원들이었다.

 

소수 사람들만 정신 차리면 될 일을 전체 모든 공무원에게 확대하는 것은 무리다. 과거 김지하 시인은 나라를 좀먹는 ‘오적(五賊)’으로 장차관과 고급공무원을 지목했다. 선견지명이 대단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사실 국장급 이하 공무원들은 나라를 뒤흔들만한 비리나 부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게다가 신분이 보장되기 때문에 돈만 받지 않으면 좌천 정도로 끝난다. 영혼 있는 공무원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임명권자가 만들어 주는 것이다. ‘공직자는 국민을 위한 봉사자이지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며 정권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직자가 돼서는 안 될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대상은 가까운 데 있다.

 

이인재 한국뉴욕주립대 석좌교수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