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에서 출발한 일본의 근대화가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에 이르는 것과는 다른 역사를 보여줄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해 본다면, 이에 대한 대답에는 메이지 유신의 이념적 지향점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메이지 유신의 지향점은 ‘부국강병’을 통해 서양 열강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과 민주주의 국가의 건설 등 2가지로 볼 수 있다. 부국강병은 성공했으나 민주주의 국가 건설은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부국강병의 지향은 군국주의와 대동아 공영권 건설로 변모되어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이라는 귀결을 맞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을 메이지 유신의 한계로 볼 수 있다.
이는 영국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영국과 일본은 1904년 영일 동맹을 맺을 정도로 이해관계를 공유했으나 이후 영국과 일본은 각각 자유주의 진영과 국가주의 진영의 다른 행로를 가게 되어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상이한 운명을 맞이하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이 아시아 국가 중 일본에서 가능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당시 일본이 봉건제하에 있었던 것이 주요한 요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즉, 도쿠가와 막부가 약 270년간 통치했지만, 개개의 번(藩)은 영주를 중심으로 하나의 독립된 국가와 같이 정치와 경제를 운영했으며, 규모가 큰 번들은 상호 경쟁 하에 자국 번의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이러한 번들 간의 경쟁은 ‘난학(蘭學, 네덜란드로부터 수입된 근대 문명)’을 발전시켰고, 난학을 통해 서양 문명의 우위를 깨달은 일본의 대외개방 세력이 서양의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메이지 유신을 추동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역사적인 가정의 하나로 흥미로운 것은 만약 19세기 말 일본이 봉건제가 아니라 조선이나 청과 같이 천황이 통치하는 중앙집권적 왕조체제였다면,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한 근대화의 길을 갈 수 있었을까.
왕조체제하의 일본이었다면 조선이나 청과 마찬가지로 왕조를 지키기 위해 근대화에 대해 매우 수동적으로 대처하다 서양 열강의 침략을 당하는 유사한 운명을 겪었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고 본다. 왕조체제는 스스로 체제를 보존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해 집권층이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속성이 있으므로 일본의 근대사도 전혀 다른 역사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일본도 당시 집권층이었던 도쿠가와 막부는 내부개혁과 대외개방에 소극적이었으나, 반(反) 막부 성향을 가진 조슈번과 사쓰마번 출신이 중심이 된 유신 세력이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한 근대적 중앙집권적 국가를 건립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메이지 유신은 막부의 봉건체제에서 천황이 지배하는 근대국가로의 이행과정이 없었다면 성립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길수 前 주그리스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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