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장곡리 움집을 아시나요…6.25피난민들이 한동안 모여 살던 곳.

▲ 김원규씨 장곡3리 움집1
▲ 장단면에서 11살때 피난나와 장곡3리 수용소에서 피난생활을 했던 김원규씨가 당시 지어졌던 움집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김요섭기자

“피난민 수용소시절 움집(움막)을 아시나요?”

 

24일 오전 파주시 조리읍 장곡3리.

 

6.15전쟁때 파주군 장단면 등지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피난생활했을때의 주거향태였던 움집은 전쟁이 발발한지 68년이 됐지만 당시 상흔을 간직 한채 아픈 세월을 증언해 주고 있었다.

 

미군은 6.25전쟁당시 파주 상지석리 등 5곳에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 했다.

 

장곡3리도 그중 한곳이다.

 

이곳 수용소 움집에서 개성시, 장단면, 진서면 등지에서 몰려든 600여명이 피난 생활을 오랫동안 했다.

 

장곡 3리 움집은 대부분 산골짜기 밑에 지어져 있다.

 

▲ 김현규장곡3리 2
▲ 장단면에서 11살때 피난나와 장곡3리 수용소에서 피난생활을 했던 김원규씨가 당시 지어졌던 움집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김요섭기자

현재는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지붕이 슬레이트로 씌어져 있으나 당시에는 수수깡, 아카시아나무 등으로 지붕을 엮었다.

 

원형, 직사각형으로 땅을 파 구들을 깔아 놓았다.

 

높이가 2m 정도, 보유식구에 따라 최고 4칸까지 방을 들였다.

 

아궁이(회덕)도 있고 연기가 방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막기위해 뒤컨에 굴뚝도 설치 했다.

 

건축면적은 20~30평규모 정도였다.

 

장단면에서 11살때 부모를 따라 장곡 3리로 피난내려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김원규씨(79)는 “수용소시절 물자가 열악해 간이 천막에서 아홉식구가 살았다”면서 “1년뒤 피난민들은 천막생활에서 벗어나 미군이 원조한 나무(2m규격)를 이용해 움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140여채가 엉성하게 지어졌다. 피난민들은 천막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집을 지었다”며 “전기가 없어 등잔불로 생활하는 등 원시인의 삶이었지만 내집을 마련했다는 뿌듯한 마음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지금 움집과 그 옆에 현대식 집을 지어 이를 연결해 생활하고 있다.

 

김씨는 “식구들과 전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때문에 주어진 재료만으로도 튼튼하게 지었다”며 “움집은 전쟁 참혹함과 죽을 겨우 먹던 시절 배고파 울던 막내동생을 달래 주던 아픔 등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고 말했다.

 

피난수용소에 지어졌던 움집 140여채는 지난해 까지 생존해 있던 일부 피난민 들이 사용하던 6채 정도만이 원형대로 남았지만 후손들의 별다른 보호대책 없어 방치 돼 있다.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대표작가는 “장곡3리움집은 전쟁피해자인 서민들의 피난생활 할 때 살던 주거형태여서 높은 보존 가치를 갖고 있다”며 “파주시가 전쟁알리기 체험 등을 위해서라도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주= 김요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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