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해바라기 키우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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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꿈 많은 나이의 수진이(가명, 13세)에게 인생은 지옥이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 계모와 살던 수진에게 아버지는 단 둘이 있는 기회를 틈타 몹쓸 짓을 하였고, 이후로도 아버지는 틈만 나면 수진이 몸에 손을 댔다. 

유일하게 의지했던 아버지로부터 받은 충격과 공포는 수진이를 외롭고 고독한 세상 속에 꽁꽁 가두었다. 고2가 돼서야 사건이 우연히 알려지고 경찰수사가 시작됐지만, 수진이는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를 입에 올리기조차 힘들어했다. 아픈 상처를 꺼내야 하는 대목에서는 울다가 뛰쳐나가기를 반복했다. 심각한 우울과 불안 증상이었다.

 

수진이를 어둡고 긴 터널에서 꺼내주는 것이 시급했다. 담당 수사관과 ‘해바라기센터(성폭력 피해자 통합지원센터)’, 아동보호전문기관, 피해자지원단체 등이 머리를 맞댔다. 해바라기센터는 수진이의 심리 상담, 의료지원과 수사를 동시에 진행하였고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는 쉼터 연계를, 피해자 지원 단체에서는 생계비 및 직업교육을 지원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비로소 수진이는 꿈 많은 또래 소녀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다. 그 상처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남들처럼 삶의 희망이란 것을 갖게 되었다.

 

해바라기센터는 수진이와 같은 피해자들에게 그야말로 ‘해’와 같은 존재다. 2004년 서울해바라기센터를 시작으로 전국 38개소에서 운영 중인 해바라기센터는 상담·수사·치료 전문가들이 상주하면서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피해자 등에 대해 365일 24시간 심리 상담과 의학적 치료, 법률상담과 수사지원을 한 번에 제공하고 있다.

비록 짧은 역사지만, 수사와 동시에 신속한 피해회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경찰청과 여가부, 자치단체, 각 지역의 병원이 협조하는 훌륭한 협업 모델로 자리 잡았고, 최근에는 많은 국가에서 이 시스템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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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각 지역의 해바라기센터는 아직 그 수가 부족한 형편이다. 경기남부지역에는 단 3개소의 센터가 있는데, 점점 증가하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더구나 센터가 없는 지역의 피해자들은 신속한 지원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센터가 부족한 이유 중 가장 큰 문제는 협력 병원 발굴의 어려움이다. 의료연계를 위해 병원 내에 산부인과, 정신과 등을 갖추어야 하고, 병원 스스로의 자발적 의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정폭력, 성폭력 등으로 멍들고 찢어진 상처를 안고 웅크린 채 살아가는 수많은 제2의 수진이가 해바라기처럼 당당하게 해를 향해 바로설 수 있도록 해바라기센터 확대 등에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상처받고 넘어진 자들에게 아직 세상은 살만하고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태어난 지 며칠도 안 돼 큰 시련 겪으면서도, 세상을 향해 있는 힘껏 환한 웃음 짓는다. 가느다란 여린 몸 곧추세워 희망의 등대가 되어주는, 고 어린 것 참 장하고 기특하다…’(정연복, ‘아기 해바라기’)

 

윤성혜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여성청소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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