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사는 수원 영통의 단오어린이공원에는 수령이 무려 536살이고, 높이는 33.4m에 이르는 느티나무가 있었다. 조선시대 때부터 단오절이면 사람들이 나무 주변에 모여 전통놀이를 즐기던 유서 깊은 나무였다. 1790년 정조 때 이 나무의 가지를 잘라 수원화성의 서까래를 만들었다고도 하고, 나라에 어려움이 닥칠 때 나무가 구렁이 소리를 내었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주민들은 매년 단오에 나무 주변에서 ‘영통 청명 단오제’를 열었다. 축제는 청명산 약수터에서 지내는 ‘산신제’로 시작되어 느티나무 앞 ‘당산제’로 이어지곤 했다. 이 역사적인 나무가 지난 6월, 폭우와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부러져 버렸다. 거대한 나무줄기가 사방으로 찢어진 처참한 모습에 사람들은 놀라고 슬퍼했다. 사람들은 이 나무의 생이 다했다고 여겼다. 바람에 꺾일 정도로 늙어 줄기가 부러지고 찢어진 나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깜짝 놀랄 일은 그 이후 벌어졌다. 늙고 부러졌지만 그 뿌리는 아직 살아남아 새로운 새싹과 줄기를 틔운 것이다. 20여 개의 새싹 중 긴 것은 이미 1m가 넘는 줄기로 자라났다.
사람의 삶도 이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싶다. 살다보면 눈앞이 깜깜하고 꼼짝할 수조차 없을 때가 있다. 남은 것 하나 없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희망은 절망의 등 뒤에 숨어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희망은 절망의 끝에서 시작된다. 다만, 희망이 그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희망은 절망의 뒤안길에 그것이 있음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다. 절망의 긴 세월을 버티며 견딜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 세상에 삶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라고 자부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불행 중에서 행복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행복과 불행은 하나의 감정이다. 주위에 아무리 많은 행복이 널려 있어도 불행을 선택한 사람은 불행하게 되고, 수많은 불행 중에서 하나 밖에 없는 행복을 선택한 사람은 행복하게 된다.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의 2018년 OECD 보건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6년 기준 한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평균의 11.6명(인구10만 명당)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25.8명으로 자살률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자살률이 가장 낮은 터키와 비교하면 무려 12배가 넘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9년을 정점으로 조금씩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지만, 아직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는 월등히 높은 수치이다. 무엇이 대한민국을 자살공화국으로 만들고 있는가? 전문가들은 ‘죽음이 삶보다 덜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짧은 생각과 ‘내가 죽음으로써 너희에게 고통을 주겠다.’는 복수심이 자살을 부채질한다고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의 싹은 숨어 있음을 한번 믿어보자. 목숨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건강한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플라시보 효과라는 말이 있다. 환자에게 가짜 약을 처방하면서 “이 약은 참으로 신통한 신약입니다. 몇 번만 드시면 증세가 호전될 겁니다”고 확신을 주면 신기하게 효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사실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가? 바로 희망의 기적이다. 그 약을 받는 순간, 환자에게는 “아, 이제 이 약을 먹으면 낫겠구나!”라는 희망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렇게 속아서 가지게 된 엉터리 희망이 정말로 기적 같은 효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렇듯 희망은 진실과 상관없이 그 현상 자체로 무한한 힘을 발휘한다. 희망의 뿌리는 절망이며 절망에서 벗어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아픈 곳이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어딘가 아픈 곳이 있다. 삶이 힘들고 아프다는 것은 우리가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정종민 성균관대 교육학과 겸임교수(전 여주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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