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오가는 사람,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걸음을 멈춘 사람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정치인의 말은 못 믿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대중 앞에서 연설이 쑥스러웠던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기가 죽어서 그날 유세를 접었다. 고민 끝에 연설의 방향을 바꿨다.
이튿날 거리 유세에 나선 나는 공약을 나열하지 않았다. 그저 주민의 목소리를 많이 듣고 함께 정책을 만들고 지역 발전을 위해 함께하겠다고 했다. ‘백지’ 공약을 내놓으니 대중의 마음이 움직였다. 경기도의원에 처음 출마했을 때 이야기다.
지난 7월 경기도의회 의장 출마에 나서면서 ‘송보따리가 되겠다’는 공약을 내건 까닭도 이런 연유다. 한글 지킴이 주시경 선생의 별명을 빌어 경기도의원의 공약을 함께 지키는 의장이 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도민의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진 공약은 대의기관인 경기도의회의 존재 이유다. 그래서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경기도의원 공약을 집계하고 관리할 팀을 발족했다. 경기도의회 역사상 처음으로 공약을 집대성해보니 모두 4천194건이었다.
경험상 공약의 실현은 법적 근거나 정책의 가능성, 예산의 확보 등 노하우 없이는 실현도 요원하다. 정책지원 전문인력도 없이 혼자 고군분투해야 하는 도의원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안다. 더욱이 이번 제10대 경기도의회는 초선의원이 76%이니 경험적 역할이 더욱 절실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경기도의회의 공약관리는 순항 중이다. 공약의 공통분모를 파악해서 집행기관에 정책 제안도 이뤄졌고, 내년 예산에 경기도청 관련 82개 사업 5천105억 원을, 경기도교육청 관련 38개 사업에 8천298억 원을 담았다. 미처 못 담은 정책과 예산은 추가경정예산에 반영할 예정이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현장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래서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다. 도민의 대의기관으로서 끊임없이 현장의 소리를 듣고 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의장이 되고 도민의 재난재해 현장마다 찾아다닌 것을 시작으로, 요즘은 경기도 31개 시ㆍ군 중에서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 목소리부터 듣고 있다.
인구 18만의 안성은 경기 남부권의 오지다. 수도권 전철이 닿지 않아 교통이 불편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안성~용인~수원을 잇는 국지도 확·포장 등 도로 공사에 대한 현장의 요구가 높았다. 가평은 지난 10년간 도로 건설이 없었을 만큼 도로 인프라가 열악하다. 포천은 석탄 화력발전소가 들어서고 가동할 예정이다. 물 좋고 공기 좋은 포천이 발전소 폭발사고로 불안해하고, 미세먼지를 걱정해야 하는 이유다. 지하철 건설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도봉산~포천 전철 건설 사업의 예비타당성 면제에 뜻을 함께했다.
정책 사업의 타당성은 비용편익분석(B/C)으로 가름한다. 그러나 인구가 적고 경제성이 없다고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을 소홀히 하면 지역 불균형이 심화한다. 사회적 인프라 부족은 기업 유치나 일자리 문제와도 연결돼 지역 침체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경기도의회 슬로건처럼 ‘사람중심, 민생중심’의 가치가 도민의 삶의 현장에 깊게 스며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책 접근 방식이 필요함을 느꼈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언제나 처음처럼 도민의 목소리를 열심히 듣고 함께 정책을 만들고 예산을 담을 터이다. 내게 가르침을 주셨던 신영복 선생님은 ‘처음처럼’이라는 시를 통해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라고 했다. 백지 공약을 내놓으며 유세 현장에 나섰던 그 마음으로, 나는 새해 새날을 시작하련다. 처음처럼!
송한준 경기도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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