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인민은 의회 의원 선거 동안만 자유롭다. 의회 의원이 선출되는 즉시 영국 인민은 노예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고 루소는 영국 대의민주제에 대해 일갈했다. 긴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 기간은 길지 않다. 피를 먹고 자란다는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도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다. 법과 제도를 정비해왔지만 곳곳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최근 불거진 지방의원들의 추태나 5ㆍ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된 인식들은 고장 난 대의민주주의를 잘 보여준다.
2016년 말부터 2017년 겨울,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다. 부끄러운 대통령을 탄핵했다. 세 번째로 현직 대통령이 불명예를 안고 자리에서 쫓겨났다. 고장 난 민주주의를 시민이 나서서 바로 세웠다. 이렇듯 대의민주주의 문제는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와 행동으로 해결되고 있다. 위임된 권력은 부패하기 쉽다. 시민의 관심과 참여가 적을수록 부패의 문제는 깊고, 강해진다. 직접민주주의 확대가 민주주의를 살릴 수 있다. 2016년 10월에 진행된 개헌 관련 조사결과를 보면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매우 높은 것으로 나온다. 민선7기 지방자치단체 주요 정책 중의 하나는 직접민주주의 확대이다. 다행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가 만능은 아니다. 오히려 숙의과정이 없는 직접민주주의는 중우(衆愚)로 빠지기 쉽다. 여러 정치제도를 고민했던 고대 그리스인은 중우의 위험을 알고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결정에 참여하는 시민은 그 내용에 대한 관련 정보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선택해 내려지는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충분한 정보와 적절한 이해가 없는 시민에게 선택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선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직접민주주의는 숙의를 전제해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숙의방법으로 다수 시민이 참여하는 원탁토론이 많이 알려졌다. 최근 시민참여를 강조하는 지방자치단체는 예외 없이 500인, 혹은 300인, 많으면 1천 명이 넘는 원탁회의를 하고 있다. 행정과 몇몇 전문가, 일부 민간단체 대표가 참여하는 위원회에서 결정하던 사안을 수백 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원탁회의 방식은 큰 진전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형식만 갖추어져 있을 뿐, 알맹이가 빠져 있는 사례를 자주 본다. 두세 시간 만에 마무리되는 원탁회의는 허구다. 최소한 1달 전부터 판단하려는 사안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고, 의견을 묻고, 함께 모여 토론하는 자리가 선행돼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원탁에 모여 최종 토론을 하고 결정해야 올바른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민주주의는 문화로 생활 속에 녹여져야 한다. 학습과 경험으로 체득되어 습관이 되고, 각 개인의 습관이 모여 사회적 생활양식이 돼야 한다. 법과 제도에 머문 직접, 그리고 숙의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최적의 공간과 범위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주민이 관심을 두고 참여할 수 있는 사안을 발굴하여, 토론하고, 함께 모여 결정하는 경험을 반복해보자. 마을계획을 세우고 주민총회도 해보자. 마을 특성을 살린 마을헌법도 만들어보자. 민주주의도 풀뿌리가 튼튼해야 더 많은 꽃을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유문종 경기도따복공동체위원회 공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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