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우정면 3·1만세운동 증조할아버지 이어-
1919년 4월 3일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현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에서 강력한 31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마을부터 4명으로 시작된 이 일대 만세운동은 4월 15일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연결되었다. 31만세운동 당시 일제가 방화한 전국 715채 민가 중 수원ㆍ화성지역은 328채나 됐으며 전국 700여명 피살자 중 수원·화성지역에서만 47명이 피살됐다.
이곳의 만세운동은 31만세운동 초기의 비폭력적 운동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주민들은 미리 일본인 순사 살해반과 주재소 및 면사무소 방화반을 조직하고 실행방법을 준비하며 일제에 빼앗긴 우리 강토를 실력으로 되찾으려는 강력한 의지를 다짐했다.
독립만세를 부르며 주민들을 모으고, 주재소 및 면사무소를 포위하여 돌을 던지고, 곤봉으로 문을 파괴하고, 방화반은 방화하고, 처단반은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는 방법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4월 3일 오전 12시경에 400여명의 주민들이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였고, 1천500명으로 불어난 주민들은 오후 3시경 인근 우정면사무소도 파괴했다. 이어 2천여명으로 불어난 주민들은 오후 5시경 주민들을 괴롭혔던 일제 순사들이 있는 화수주재소를 포위하였으나 주재소에 있던 가와바다 순사의 발포로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총상을 입었다. 주민들은 총탄을 뚫고 들어가 주재소에서 도주하던 가와바다 순사를 처단하였다.
4월 4일 새벽에 일본군 아리다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와 발안과 수원 지역에서 온 순사들이 합세해 장안면과 우정면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두 개면에서 독립투사를 잡는다고 가옥 80채를 방화했으며, 400여명 이상이 검거되어 고문과 탄압을 받고, 4월 15일 35명이 구속, 40명이 수배되었다. 도합 50명이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이들은 징역 15년에서 1년까지 형량을 선고받았다. 모진 고문의 여파로 옥중에서 순국한 주민도 있었다.
31운동과정에서 내란죄로 의율된 것은 손병희 등 독립운동주도자 48명, 평북 의주, 황해 수안, 경기 안성 지역과 수원·화성 지역의 독립투사들이고, 독립투사들을 잡겠다고 전국에서 715채를 불태웠는데 그중에 328채가 수원·화성지역에 집중해 있는 것을 보면 일제가 얼마나 기를 쓰고 수원·화성의 독립운동의 불길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는지 말 수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사건이 화성 발안 지역 제암리 학살사건이다. 4월 15일 아리다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경은 우정면과 장안면 인근의 제암리에 와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며 기독교도·천도교도 약 30여명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후 문을 모두 잠근 상태로 집중사격을 하고, 교회당에 방화하여 바깥으로 나오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까지 모두 불에 타죽게 만들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말았다.
화성지역 장안면·우정면 31만세운동과정에서 당시 25세로 석포리에 거주하던 윤영선 지사는 최초 만세운동 주도자로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윤영선 지사에게는 1990년 독립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지금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우정파출소에는 선생의 증손녀 윤보라 순경이 증조할아버지가 그토록 되찾고자 하던 고향땅을 지키고 있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같은 곳에서 증손녀가 증조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 한켠이 뭉클해 진다.
강윤식 화성서부경찰서 경무과장 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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