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우리에겐 아침이 저녁보다 더 소중하다

2012년 이맘때로 기억한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내게 힘이 되는 나라, 평등국가’, ‘빚 없는 사회, 편안한 나라’, ‘걱정 없는 나라’ 등 여전히 ‘나라’와 ‘국가’가 앞세워진 정치 구호들의 범람 속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란 슬로건은 단연 돋보였다. 문재인 당시 민주당 후보가 내건 ‘사람이 먼저다’도 국가가 아닌 사람을 먼저 얘기한 점에서 좋았지만 역시나 최고는 ‘저녁이 있는 삶’이었지 않나 싶다. 정작 이런 멋진 슬로건을 제시한 분은 본선에 나서보지도 못했지만,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자는 ‘워라밸’이란 신조어 등장과 함께 노동시간 단축 논의의 공감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냄으로써 지난해 7월에 개막된 ‘주52시간 근무’ 시대의 1등 공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주52시간 근무제 도입 1주년을 맞아 최근 실시한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대부분의 직장인은 주 52시간제가 정시퇴근 문화 정착을 통해 개인 여가 활동과 함께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늘려줌으로써 삶의 질을 매우 높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침은 달라졌는가.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저녁 시간과는 달리 직장인들에게 아침 시간은 여전히 1분 1초를 다투는 소위 ‘출근전쟁’이다. 지금 당장 10분만 더 잘 수 있다면 영혼까지도 팔 수 있겠다는 황당한 생각도 9시 출근 직장인들이라면 다들 한 번쯤은 가져봤을 것이다. 역세권 아파트의 시세가 주변 비역세권에 비해 수억 원씩 더 비싼 것도 실은 아침 출근길 30분의 경제적 가치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교통투자사업 평가의 기준인 예비타당성조사에서는 출근통행의 시간가치를 일반적인 업무통행과 동일하게 보고 1만 8천626원시로 산정하고 있다. 즉, 아침 출근길 30분의 여유를 돈 주고 살 수가 있다면 평균적인 직장인들은 대략 1만 원 정도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침에 좀 더 잘 수 있고 가족들과 편안하게 식사하고 차분하게 용모를 다듬을 수 있는 황금 같은 아침 30분의 가치가 과연 이것밖에 안 될까. 실제로 교통 분야에서는 정시 도착(on-time arrival)을 하지 못했을 때 겪게 되는 손실(penalties for early or late arrival time)에 관한 다양한 이론과 실증연구가 많이 있으며, 최근 국내 연구 결과들을 보면 통행 정시성에 대한 가치가 1시간당 8천878원~1만 1천482원 정도로 제시되고 있다. 해외단체여행에서 가이드들이 여행객들을 무조건 최소 3시간 전까지 공항으로 모시고 가고, 꽤 많은 직장인들이 새벽 출근 후 회사 근처에서 운동하고 하루를 준비하는 것만 보더라도 정시 도착에 대한 경제적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는 정부가 출근 시간 줄이는 것을 교통정책의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자명하다.

2019년 최신 통계를 보면 경기 지역 직장인들은 출퇴근에 평균적으로 2시간 14분을 보내고 있다고 나온다. 평균값이 이 정도인 것이고 새벽별 보고 집을 나서야만 하는 샐러리맨들도 부지기수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저녁 있는 삶’을 넘어서 ‘아침 있는 삶’을 논의해야만 한다. 가족들과 아침 식사도 같이 못 하고 머리 말릴 시간조차도 부족해 축축한 머리로 지하철로 버스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청년들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것인가. 故 백남준 선생이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당신의 삶은 성공적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과 함께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엄청나게 성공적이죠. 지금까지 나는 아침 8시에 일어나지 않아도 됐거든요.” 우리 모두가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로운 천재 예술가가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침 7시쯤 일어나도 괜찮은 삶을 누릴 자격은 되지 않는가.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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