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무기인 칼의 역사는 인류 문명사로 직결된다. 청동검을 처음 활용한 부족은 주변 세력을 정복했으나 이후 강철검으로 무장한 군대에게 무릎을 꿇었다. 칼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확장시킨 ‘코페쉬’처럼 휘어지기도, 태동기에 막 보급돼 로마제국 팽창의 조역이자 강력한 신무기로 이름을 날렸던 ‘글라디우스’처럼 짧아지기도 했다. 이후 전쟁양상에 따라 중세유럽의 양손검 ‘투핸드소드’처럼 크고 길어지기도 했다.
현대전에서도 보병 최후의 무기는 결국 총검이다. 전설 속 아더의 ‘엑스칼리버’나 지크프리트의 ‘발뭉’, 중국 오나라의 ‘간장막야’, 월나라 구야자의 ‘어장검’ 등은 나라의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도 백제의 ‘칠지도’나 악귀를 베는 ‘사인참사검’ 등이 인상 깊은데, 소설가 김훈은 왜구를 물리쳐 조국을 지키는 이순신 장군의 장엄한 모습을 ‘칼의 노래’로 만들어냈다.
힘없는 백성에게 칼은 무서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든든한 것이었다. 칼은 한 부락을 남김없이 몰살시키기도 했지만 적의 침략으로부터 숱한 생명을 구해냈다. 그런데 이렇듯 무서운 칼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혀의 검, 설검(舌劍)이다.
칼에 베인 상처는 시간이 흐르면 낫지만, 혀에 베인 상처는 잘 낫지 않는다고들 한다. 얼마 전에 젊은, 어찌 보면 어리기까지 한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른바 악성댓글이 그 원인 중 하나라는데, 그 파릇한 목숨이 참으로 아깝고 슬프다. 악성댓글은 더 안 좋게 변형된 설검일 것이다. 칼은 몸을 해칠 뿐이지만 설검은 영혼마저 파괴한다. 거짓 비방이나 중상모략으로 훌륭한 인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행위를 일상에서 드물지 않게 본다.
설검의 형태는 다양하다. 거짓된 허언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같이 망친다. 꾸며낸 교언은 간신의 전유물로서 언제나 나라를 쇠약하게 만들었다. 명심보감에서 남의 험담을 하는 것은 ‘입으로 피를 뿜어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성경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있다’라고 했으며 법구경에서는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찌르는 칼’이라고 했다.
인터넷 같은 무한회선을 타고 증식하면서 설검은 더 잔혹해졌다. 질투나 증오, 폭력성 같은 음험한 악의로부터 비롯된 설검이 아무런 제지 없이 함부로 휘둘러진다면 우리 사회는 괴롭고 황폐한 곳이 될 것이다. 비판적 의식을 바탕으로, 부당한 이야기나 떠도는 평가 따위에 현혹되지도,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옮겨서도 안 된다. 움베르트 에코는 ‘대중의 슈퍼맨’에서 모든 슈퍼맨들은 대중의 비밀스러운 욕망에 적절히 부응한다고 했다. 슈퍼맨이 그저 창조된 이미지이듯 악인도 대중의 내밀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가짜 이미지에 불과할지 모른다.
설검은 잔혹하나 휘두르는 것은 사람이다. 법에는 법의 도리가, 말에는 말의 도리가 있다. 시민사회의 정당한 비판을 위축시켜서도 안 되지만 반대편끼리 꼭 싸워야 할 때 조악한 설검보다는 신랄하지만 수준 높은 유머로 싸우면 어떨까. 더러운 말에는 귀를 씻고 입으로는 배려하는 고운 말, 정직한 말, 칭찬하는 말을 더 많이 하면 어떨까. 나아가 내 말에 다친 이에게 지금 용기 내어 사과한다면 어떨까. 설검이 잔혹한들 진실을 분별하려는 밝은 눈과 인정어린 따뜻한 심장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며 설검이 아무리 잔혹한들 침묵의 고상함속에서는 끝내 무력할 것이다.
김성훈 손해보험협회 중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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