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증조모 기일이라 시골을 다녀왔다. 행사와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두 며느리의 부재 속에 치러진 제사였다. 상황이 이해되는 바가 아니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완고하신 아버님조차 제사를 지내는 방식과 내용에 대하여 고민하게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어머님은 아들들과 마침 휴일이라 큰딸 내외까지 불러 10㎏에 가까운 찹쌀떡을 만들었다. 5남매와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기쁨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나마 부모님이 구존하는 덕에 고향은 내겐 태어나고 자란 공간 이외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며느리와 자식들에게는 1년에 몇 번 오는 의무와 상징의 공간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자식들조차 이곳은 그들의 고향이 아니다.
지역공동체조차 해체되고 분절적인 공간이 되었고, 도시로 나간 자식들을 찾아 역귀성하는 상황이라 왁자지껄한 설날의 풍경이 사라진 지 오래다. 더욱이 고향 집 앞에서 대문을 열면 푸르른 마을 앞산에는 높다란 공장 창고가 들어섰다. 마을 옆으로 대단위 공단부지가 조성되는 모습은 몇 년 전 선산 입향조와 4대조 분묘를 화장으로 면례해야 했던 충격적 변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자본의 욕망으로 안온했던 고향은 사라진 지 오래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옛 수원군이지만 지금은 화성시가 되었다. 3·1운동의 격렬한 항쟁지였던 그곳은 당시 화수리 경찰관주재소의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한 역사적 현장이었다. 경찰관 주재소가 조암으로 옮겨가고서 그곳에 학교가 세워졌고 나는 그 학교에 다녔다. 일제에 의해 멀지 않은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은 화수리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고,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경영은 미국 제국주의의 필리핀과 맞바꾼 것이라는 사실을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면서 알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한 가장 위대한 3·1운동의 현장이 고향이라는 사실까지.
이제 고향 땅은 군 공항이 들어서느냐 마느냐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수원 군 공항이 오느냐 마느냐, 수원시와 화성시의 옳고 그름은 논하고 싶지 않다. 분단된 조국에서 전범국 일본을 대신해 한반도를 분할한 장본인이 미국이었다는 점과 여전히 미군 비행장이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몇 년 전 미군이 운용하던 매향리 쿠니사격장 철폐과정에서 미군은 없고 시위대와 한국 경찰들만 처절히 싸우던 모습이 오버랩되는 상황이다.
분단된 현실을 해결하면 될 일인데, 제국주의와 외세는 궁벽한 고향의 안온함마저 빼앗고 있다.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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