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음악이 없으면 살 수 없다’라고 하였다. 동의한다. 좋은 음악이 그렇듯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은 대단히 아름답다. 내재된 감성을 하나하나 끌어내며 심장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것 같은 충격을 준다. 이 유한한 목숨을 찰나일망정 저 영원에 잠시 접근시킨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빠르고 느린 곡조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배열하면서 피아노음 간격을 최적으로 구성하는 영리한 속도관리에서 창조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음악은 음과 무음을 번갈아가며 연속시키는 시간의 예술, 속도의 미학이다.
삶이나 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삶,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꾸며가려면 속도관리가 필요하다. 한강의 기적은 빠른 속도관리를 통해 달성되었다. 일제 강점기와 동족전쟁의 비극을 겪으면서 국민은 절치부심하였고 굶주린 가족을 두고 좌고우면할 여유도 없었다. 이른바 ‘빨리빨리’는 우리나라를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빠른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난 국민적 조급증은 여러 가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건축 공기가 지나치게 빨랐던 부실시공으로 건물이나 다리가 무너져 많은 인명을 앗아간 붕괴사고는 아직까지 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도로 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과속을 일삼거나 불필요한 차선변경을 하는 차량이 종종 보인다. 실제 실험에 따르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법규를 준수하며 간 차량과 과속운전으로 도착한 차량 간의 시간차이는 불과 30분 남짓인데도 일부 운전자는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해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기꺼이 무릅쓴다. 위협운전은 어리석은 만용이며 확률적으로 음주운전은 살인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로마는 중갑보병을 가진 덕택에 세계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중갑보병은 충성심과 거북형 방진 외에도 빠른 기동력을 자랑하는 부대였다. 빠른 이동이 가능하니 작전반경이 넓었고 적의 의표를 찌를 수 있었다. 최근의 감염병은 치료제나 백신 등이 나와야 최종적으로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전 인류가 빠른 개발을 기대하고 있다.
반면 사랑하는 가족, 통하는 벗들과는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내도 된다. 슬로우 푸드는 몸에 좋다. 중요한 정책을 만들려면 시간을 들여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 집단지성을 믿어야 한다. 오래 남을 예술적 건축물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밀란 쿤데라는 ‘느림’이라는 소설에서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졌는가’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느림이란 게으름이나 무능력이 아니라 삶을 돌이켜보며 성찰하는, 미학적 삶의 시작이다.
꼭 민식이법이 아니더라도 어린이보호구역에서는 최대한 천천히 가야 한다. 아무리 번거롭고 바쁜 일이 있어도 어린이보호구역에서는 주차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빠른 속도가 요구되는 것은 어린이보호구역이 아니라, 초등학교 학부형 달리기 시합이 있는 운동장에서다.
멀리 하늘에서 활공하는 새매에게 인간의 조급함은 우스운 것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가쁘게, 때로는 천천히. 생의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삶을 의미심장하게 이어나가면서 사회를 좀 더 윤택하게 만드는 것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같은 감동적인 속도관리일 터이다.
김성훈 손해보험협회 중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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