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전 장관의 글에 보면 “조조(曹操)는 두통이 날 때마다 진림(陳琳)의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아픈 것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소(袁紹)의 편에서 자신을 비방해 오던 진림이 포로로 잡혀 왔을 때에도 벌하지 않고 중용했다.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글이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經夜): FINNEGANSWAKE’라는 소설이 있다. 흔히 ‘율리시즈에 이은 제임스 조이스 최후의 대작’이라고 소개되는데 서구 수천 년의 역사를 주인공의 하룻밤 꿈 속에 압축했다고 한다. 17년간에 걸쳐 60여 개 언어의 응축으로 문학이 가능한 모든 기법과 문체의 실험장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김종건 교수가 전 세계에서 4번째로 번역에 성공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가장 읽기 어려운 문학 작품 리스트에 항상 1위로 꼽힌다. 구입하기는 그렇고 서점에서 읽어보니 5분도 안 되어 “이건 미친 짓이야. 내가 뭐하고 있지? 이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조이스가 문제야”로 귀결된다. 머리가 시원해지기는커녕 빠개질 것 같다. 좋은 글은 번역을 해도 역시 좋은 글이 된다. 제임스 조이스에 너무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글만 읽어도 시간이 부족하다. 나에게 좋은 글은 잘 읽히는 글이다. 잘 읽힌다는 것은 글이 운율을 맞출 때 가능하다. 게다가 내용도 좋고 글 자체가 정확하고 분명하면 금상첨화다. 쓸데없이 힘이 들어간 글은 목에 가시가 걸린 것과 같다. 사설이나 칼럼은 역시 논설위원들이 잘 쓴다. 자료도 많고 거의 매일 쓰기 때문에 짜임새가 좋을 수밖에 없다. 근육을 매일 단련하듯이 글도 매일 써야 실력이 는다. 소위 전문가라고 행세하면서 비문(非文:문법에 맞지 않은 문장)과 횡설수설 써대는 사람의 글을 볼 때마다 혈압이 오른다. 요즘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는 신랄한 독설로 환호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 진중권 씨의 글을 보게 된다. 그는 어느새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루에도 여러 건의 글을 올린다. 그의 글은 간명하고 강한 어조이지만 매우 설득력이 있다. 문제의 핵심을 확실히 짚으면서 신속하게 대응하니 사람들의 전폭적인 관심을 끈다. 하나의 ‘독립언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중권 씨의 촌철살인 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미학 오디세이’를 비롯해 수십 권의 저서가 있다. 방대한 독서량과 엄청난 필력이 뒷받침한 결과다. 남을 비난하는 글도 격조가 있다. 언론계에 오래 근무한 분의 말을 빌리자면 ‘흉내 내기 어려운 글’이다. 오늘도 많은 글들이 양산되고 있다. ‘글의 시대’가 가고 ‘말의 시대’가 왔다고는 하나 말도 결국 글에서 출발한다. 글쓰기의 소중함과 그 힘을 제대로 깨닫고 있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든다. 머리가 시원해지는 글을 읽고 싶다. 머리가 시원해지는 글을 쓰고 싶다. 자기 전에 한 페이지도 못 넘기고 포기하는 글도 수면제로서는 최고다. 최근에는 ‘이슬람의 역사’라는 책이 수면제다.
이인재 건국대 행정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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