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이분법 사회 아닌 상생의 사회를

점점 뉴스와 신문을 보기가 두려워지고 있다. 언제부턴가 미담소식은 가뭄에 콩 나듯 하더니, 이제는 다툼의 기사만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주요 뉴스 상단에는 화합보다는 갈등을 유발하는 소식들로 즐비하고, 타협을 모르는 찬·반 논쟁과 불필요한 진실·거짓 공방만이 연일 국민의 관심을 유도한다. 왜 이렇게 우리 사회가 이분법 사회가 되었을까? 이 시대에 상생(相生)은 추구할 수는 없는 가치일까?

음양오행설에서 상생(相生)은 금(金)은 수(水)와, 수는 목(木)과, 목은 화(火)와, 화는 토(土)와, 토는 금과 조화를 이뤄 둘 이상이 서로 북돋우며 다 같이 잘 살아감을 뜻한다.

반면 기독교의 상생(常生)은 예수를 믿고 그 가르침을 행함으로써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불교의 상생(上生)은 극락왕생의 구품(九品) 가운데 상품, 중품, 하품의 각 윗자리. 상품 상생, 중품 상생, 하품 상생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한자로 풀어보면 나무(木)를 눈으로(目) 보듯 상대방을 잘 살핀다는 뜻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상생을 미덕으로 추구하는 나라였다. 하지만 아픔의 현대사를 거치며 우리는 이분법의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과 반일, 해방 이후에는 친탁과 반탁으로 우리 민족은 둘로 갈라졌고, 한국전쟁은 다시 우리를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놓았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에는 유신세력과 민주화 세력으로 갈라졌고, 냉전이 끝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좌파이니 우파이니 선 긋는 것에만 혈안이다. 이 같은 갈등은 우리 사회 도처에 만연해 있다. 노동시장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모든 경제생활에서는 갑(甲)과 을(乙)의 관계가 지배하고 있다.

민초(民草)의 삶은 과거나 지금이나 늘 그 자리에 있건만, 왜 국민은 여전히 이분법을 강요받아야 할까? 어찌 보면 자신의 권력에 이용하려는 정치인과 특권층이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국민의 분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더 역설적인 것은 국민을 분열시키는 그들이 정작 입으로는 더 크게 상생을 외친다는 것이다.

지금 국민에겐 개인적인 권세를 누리는 정치꾼보다 국민을 따뜻하게 보듬어 줄 참다운 정치인이 필요하다. 얼굴이 연예인처럼 잘나지 못해도, 말투가 예능인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학벌이 유수의 명문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우리는 진정 국민을 위하는 참다운 정치인을 알아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만이 우리가 정치꾼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상생의 길을 함께 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조광희 경기도의회 건설교통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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