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은 창제 당시의 명칭이지만 내내 언문으로 부르다가 1894년 갑오경장 때 국문이란 공식 지위를 획득했다. 곧바로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됐으나 국권침탈로 총독 정치가 펼쳐지면서 정음은 국자의 지위를 상실하고 일본 글로 국어로 삼았다. 1923년에는 한글을 한 민족의식으로 국자로 삼았다. 이 시기 한글학자들은 사전을 편찬하다가 33인이 옥고를 겼었다. 3년 후 광복으로 풀려나면서 오늘에 이른다.
정음 창제는 조선시대 왕도 민연(憫然)정치의 핵심이었다. 민연이란 가엾이 여긴다는 의미이지만, 위민을 넘어 제왕의 권한을 포기하고 신의 내리사랑에 준하는 권한을 백성에게 넘겨 준다는 의미다. 왕조시대 우민 정책의 기조에서 이처럼 민연이라는 내리 사랑정치란 있을 수 없고 백성을 위한 문자 창제 또한 휴머니즘 표상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
세종 친제설을 부정하는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신미 대사처럼 제왕이 아닌 천출 승려 계급(당시 승려는 8대 천출 계급이어서 도성 출입도 금지되었다.)이 문자를 창제했다고 주장한다. 한글이란 명칭 속에는 왜식 식민주의를 극복하고 유물 투쟁사관을 넘어서 민족주의 사관을 반영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국권이 회복된 지금은 이런 관이나 민족 우위보다는 실사구시적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정음은 소리의 파동이요 한글은 뜻을 나타내는 입자의 성질을 가진 양자 역학적 특징을 가졌는데 이는 한글 양자 컴퓨터를 만들어 세계에 보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위에서 창제 주역은 당연히 세종대왕이라 기술했지만 기실 ‘세종’이란 명칭은 흉서 후 돌아가시고 나서 추서된 시호이다. 돌아가신 분이 창제할 수 없다. 조선왕조 시대 왕의 호칭은 대개 6가지다. 세종 큰 임금의 어린 시절 이름은 휘명(諱名)이 도(陶)이고 막동이다. 관례를 치르고 난 후 받는 자(字)는 원정이지만 호는 알 수 없다. 받들어 떠받치는 시호는 세종이고 묘호(능의 이름)는 영릉이다. 이로 보면 세종이 정음을 창제할 수가 없고 휘명 ‘도’는 사용하면 안 되는 이름이므로 원정 근 임금(대왕)이 창제했다고 말해야 한다.
원정 큰 임금을 도운 소헌 왕후와 후궁 신빈 김씨는 실험 음성학의 도우미 역할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세 벌식 자모를 발음 기관의 모습으로 상형하려면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살피려면 부부간이 아니면 도저히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해 한글날에는 화성에 있는 신빈 김씨 묘소를 참례하고 조용히 물어보고자 한다. 신빈 마마. 정음 창제 시 큰 임금께는 어떻게 어떤 도움을 주셨습니까.
진용옥 경희대 명예교수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