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齒牙) 또는 이와 비교하면 이빨은 왠지 상스러운 명칭으로 인식되고 있다. 빨이 된소리이기에 천박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 무슨 빨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점잖지 않은 표현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국어사전에도 이빨은 이를 낮잡아 이르는 말로 주로 동물의 경우를 지칭한다고 돼있다. 이리 매도됨에도 이빨은 여전하게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고 있다. 금이빨, 이빨이 깨졌다, 이빨이 갈리다, 이빨이 세다 등등. 언어 규범과 일상 사용에 상당 차이가 있기에 이빨의 어원에 대한 궁금증을 오래전부터 가져왔었다. 하지만 필자의 과문으로 쉬이 그 답을 구하지 못하던 중 하나의 발칙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빨은 ‘입’의 ‘발’이 아니었을까. 입(口)은 나와 세상이 교류하는 주된 창구이다. 이러한 입의 초입에 발(簾)이 가지런히 늘어져 있다. 발은 안과 밖을 가르기 위해 문 등에 걸리는 것이다. 이후 ‘입발’은 연음에 의해 ‘이빨’이 됐을 것이다.
입에 발이 걸림으로써 생명을 영위하기 위한 음식물이 골라지고 우리 몸에 알맞게 변형된다. 우선 입발의 엄정한 검역으로 각종 외물에 대해 먹을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이후 입발의 저작(咀嚼)으로 외물을 자르고, 찢고, 부시고, 갈아서 잘 흡수될 수 있도록 한다. 한데 갓난아이는 모자람 없이 온전한 엄마 젖을 먹기에 입발이 전혀 필요치 않다. 또 이후에도 오랫동안 탁월한 이유식을 먹기에 완전한 입발이 필요치 않다. 하지만 스스로 음식물을 가려야 하는 나이가 되면 입의 발이 필요해지고 비로소 이빨이 나는 것이다.
이빨의 의미는 단지 음식물 섭취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흔히 ‘이빨을 깐다’라고 표현한다. 거칠게만 생각되는 이 표현에서도 자못 진지한 이빨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이빨을 까며(걷으며)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빨 너머의 속내가 상대에게 그대로 드러나기에 이빨 까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 본디 그 신중이란 단지 보이는 나만 생각하는 천박한 욕심에서 벗어나 보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 즉, 우리를 함께 지향해야 한다. 특히 일단 한번 까면 다시 감추기 힘든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의 엄정함이 있기에 더욱 신중하게 이빨을 까야 한다.
마침 요란하게 이빨을 까는 선거 공간이 열렸다. 그 공간에 참여하는 정치인 모두는 이빨의 참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네 이빨이 없더라도 엄마 젖과 같은 오롯한 정책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편안한 세상을 열어줘야 한다. 또 이빨을 까는 것은 상대를 해치는 독한 언설이 아니라 정치하는 속내를 진솔하게 드러내고 그 속내에 어울리는 선량으로 나아가는 전초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계존 수원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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