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아버지의 온기

일본에도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다. 목소리가 큰 극우인사들이 부각되다 보니 양심있고 정의로운 인물들이 가려져 있을 뿐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도 있고, 환경운동가는 물론 평화헌법 수호자들도 상당하다.

5월14일은 일본의 한 정치인이 세상과 작별을 고한 날이다. 가장 양심적인 일본인 가운데 한 인물로 평가받아 왔기 때문에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친숙하다.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여느 일본의 지도자와는 달랐다. 젊은 시절 배낭 하나 메고 미국으로 유럽으로 혼자 여행도 다녔던 그는 역사의 깊이도 알고 인류사의 비극도 절실히 느껴온 정치인이었다. 1998년 총리대신이 된 후 이웃 한국과 새로운 21세기를 열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참회와 성찰의 결과였다.

성실한 인간의 표본이었던 그는 새 세기의 벽두인 2000년 총리직의 격무중에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벚꽃이 진 후 오부치 게이조도 지고 말았다. 1년 후 일러스트레이터인 그의 장녀 오부치 아키코는 <아버지의 온기>라는 에세이를 출간했다. 스키와 음악, 사진과 영화도 애호했던 정치인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아로새겨져 있다.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심이 남달랐던 오부치 총리는 이웃나라가 감내해온 모진 시간을 충분히 공감하던 지도자였다.

2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오부치 총리의 정신은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진정성이다. 오직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단어다. 큰 딸이 쓴 수필집의 제목처럼 오부치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품이 돋보이던 일본의 전직 총리는 한일 관계에 중요한 유산을 남기고 떠났다. 대미 외교에 대한 비중만큼 한국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에 대한 무게도 중시했다. 무엇보다 이웃 한국과 풀어야 할 갈등을 해소하고, 필요한 협력관계를 복원하는데 주저 않고 마음을 열었다.

일본이 태평양에 투척해서는 안 될 원전 오염수를 방류키로 결정한 배경에는 워싱턴의 묵인도 작용한다. 파리기후체제에 복귀하고 대통령 기후특사도 임명하면서 친환경 정책기조로 선회한 미국의 신행정부는 미일 동맹의 가치를 더 우선시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도쿄로서는 대미 외교가 중심이다. 지금 일본은 이웃 국가들의 우려와 항의를 외면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G7 그룹의 일원으로서의 본분을 간과하는 근저에는 자민당 본류의 외교방식이 있다.

선한 의지가 결여된 외교방책에는 후유증이 따르기 마련이다. 기후 환경문제의 대의가 무책임해 보이는 한 나라의 국가이익 속에 묻힐 수는 없는 일이다. 장기적 관점과 역사적 시각에서 국제관계를 통찰했던 오부치 전 총리의 지혜가 방사능으로 오염될 바다를 걱정하고 있다.

최승현 경기도 국제관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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