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관 관장 시절, 급한 업무를 마무리하면 하릴없이 들리는 곳이 있었다.
바로 복지관 1층에 위치한 어린이집이었다. 특히 영아반에 자주 들르곤 했었다. 다소 나이가 있는 유아반은 수업으로 필자의 존재가 자칫 방해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교육보다는 돌봄이 중시되는 영아반을 택했다. 한 손길이라도 아쉬운 담당 교사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나름의 목적도 있었으나 이 시기 아이들이 전혀 꾸밈이 없이 예쁜 까닭이 가장 컸었다.
험상궂은 필자의 모습에 처음 영아반 아이들이 상당히 경계를 했었다. 심지어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낯가림에도 줄곧 영아반에 들러 아이들을 지분거리며 상당 시간을 보내곤 했다. 격려하는 의미로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으며, 갑작스레 우는 아이를 안아 달래기도 했었다.
아이들과 어느 정도 친해진 이후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다. 한참 신나게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문을 가로 막아섰다. 그리고 한 마디, “아저씨 가지마! 우리랑 계속 놀자”. 너무도 순진한 한 아이의 프러포즈에 그날은 다른 날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아이들과 놀았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관장이었던 필자는 어린이집에서 한 전문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바로 ‘동네 아저씨와 친해지기’ 프로그램이었다. 모든 아저씨를 잠재적 성추행범(?)으로만 몰아가는 요즘, 사실 아저씨의 본래 모습이 다름 아닌 ‘옆집 아빠’라는 것을 실제 경험을 통해 알려줬다. 그리하여 자라나는 세대와 또 어느 정도 세월을 살아온 세대 사이의 세대 통합도 지향했었다.
요즘 어린이집에는 CCTV가 의무적으로 설치돼 있다. 물론 그 필요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CCTV 속 누군가의 까다로운 눈초리에 의해 필자의 동네 아저씨와 친해지기 등과 같은 비계획적 프로그램은 그 시도조차 불가능하지 않을까 우려할 뿐이다.
예전 명문가의 교육으로 격대교육(隔代敎育)이 있었다. 집안 아이들을, 살림살이로 분주한 부모 세대가 아니라 삶의 경륜으로 여유 있는 지혜를 갖춘 조부모 세대가 교육했었다. 피붙이의 교육이기에 의당 책무성이 높은 명품 교육이었다. 또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구체적 일상에서 이뤄지기에 그 내용도 포괄적이고 실용적이었다.
핵가족이 대세인 요즘 가족 내 격대교육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어르신들이 동네 아이들의 교육에 참여하는 더 넓은 수준의 격대교육은 어떨까. TV의 연예인급 아이들만 친애하지 말고 동네 구석구석에서 실제 아이들을 만나서 피붙이마냥 예뻐하고 그 교육에 일조하는 동네의 격대교육을 제안하는 것이다.
과거의 격대교육을 그대로 되살리자는 고루한 주장이 아니다. 격대교육의 기본 정신과 내용을 오늘의 교육에서 상당 부분 차용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예전 복지관에서 필자가 진행했던 프로그램이 바로 격대교육의 하나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것이다.
이계존 성남 산성동복지회관 관장/수원여대 사회복지학과 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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