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인간의 조건’으로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를 제시했다. 노동은 먹고살고자 하는 일, 작업은 질 높은 삶을 위해 하는 창조적인 일, 행위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기 위해 하는 행동을 말한다. 이 가운데 노동과 작업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하는 일이며, ‘행위’는 수많은 사람으로 구성된 오늘날 사회에서 서로 의견을 내놓고 소통하는 일로서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행위’에서의 소통은 서로 같은 생각을 이루는 게 아니라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는 다원화사회(多元化社會)를 일컫는다. 이것이 곧 우리가 인간임을 나타내는 ‘조건’이다. 인간다운 삶과 정치적 삶은 이런 행위로 말미암아 만들어진다.
지금 우리는 이와 반대로 가고 있다. 자기 목소리를 감추거나 포기하면서 같은 의견으로 통일된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다른 목소리를 내면 설득하거나 응징하며 동질성으로 다듬어 집단 속으로 끌어들인다. 다른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도 외톨이가 되는 게 두려워 같은 목소리를 내야만 살아가는 세상이 됐다. 옳고 그름으로 소통하는 게 아니라 ‘내 편’ ‘네 편’으로 가르고 내 편이 하는 일은 무조건 정당하며 상대편이 하는 일은 옳은 일도 그르게 조작해서라도 ‘삭제’ 시켜야 한다. 이렇게 나뉜 ‘틀(frame)’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침묵해야 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 해야 하는 ‘행위’가 사라지고 먹고살기 위해 다른 동물들도 하는 노동과 작업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그런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수많은 철학자가 이 명제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눈부시게 진보한 21세기에 이르러 ‘생각하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늘어 간다. 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고민할 필요 없이 만들어준 ‘틀’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주류에 편입하며 일정한 지분의 권력까지 챙겨 큰소리칠 수도 있다. 이 빠르고 쉬운 지름길을 두고 누가 힘들게 에움길로 가려고 하겠는가.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정치인들은 눈치 빠르게 이 달콤한 ‘지름길’을 맛깔스럽게 요리해서 제공한다. 그런 지름길을 만들면 쉬 동조자를 모아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모두 정치인이 되거나 정치인의 추종 세력이 돼버렸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편에 <5E96>人雖不治<5E96>(포인수불치포) 尸祝不越樽俎(시축불월준조) 而代之矣(이대지의)라는 말이 있다.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고 해서 제사장이 제사를 내버려 둔 채 주방에 들어가 요리사를 대신해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각기 제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함에도 마치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오만으로 내 일을 팽개치고 이 일 저 일 남의 일에 참견하면 조화와 질서가 무너진다.
김호운 소설가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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