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개고기는 잘못이 없다

지난달 27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주례회의에서 유기 반려동물 관리체계 개선 관련 대책을 보고받고, 이제는 개 식용 금지를 신중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일부 대선주자도 인간과 정서적 교감을 하는 반려동물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개 식용은 사회적 폭력일 수 있다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동아시아, 특히 동이의 후예들이 활동한 지역에선 개를 가축으로 간주한 사례가 많이 발견된다. <맹자>를 보면 닭과 돼지, 개와 멧돼지의 번식 때를 놓치지 않게 하면 칠십 넘은 노인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사면이 바다인 섬에서 물고기 음식이 발달하고,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곳에서 양고기 음식이 발달하듯, 산과 들이 많아 농경을 생업으로 삼은 사람들에게 가축문화는 자연스럽게 형성됐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가축 중 소와 말은 농업과 전쟁에 필수적인 동물이라 함부로 도축ㆍ판매할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사로이 소와 말을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고, 한성부가 이를 관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개고기는 백성들의 배를 불려주고 병을 치료해주는 민중의 음식이자 약으로 기능했다.

18년간 강진 유배를 간 다산 정약용은 당시 함께 유배를 떠나 흑산도로 보내진 친형 손암 정약전이 보낸 편지에서 짐승 고기를 전혀 먹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것이 어찌 생명을 연장하는 도리느냐며 질타한다. 섬에 들개(山犬)가 수천마리 있을 테니 그물이나 덫을 설치해 5일에 한마리씩 잡아 삶아 먹으면, 1년에 52마리를 먹게 돼 충분히 고기를 섭취할 수 있다고 권유한다.

또 조선시대 실학자 홍만선은 농업 관련 지식이나 일상생활의 지혜를 수록한 <산림경제>에서 약의 조제와 복약 금기 등을 기술하며, 개고기(狗肉)도 상세히 적었다.

사실 개고기 식용 금지를 주장하는 입장의 본질은 동물학대 반대도, 인간과 교감하는 개를 차마 먹을 수 없다는 감정의 문제도 아니다. 주장 이면에 내재해 있는 문화에 대한 치우친 태도가 핵심이다. 미국과 유럽의 Pets 문화가 유입되고 융합하면서, 익숙했던 문화와 가치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동물학대 문제는 간과해서도 용납해서도 안 된다. 다만 자신이 지닌 삶의 방식과 문화인식을 중심이나 보편으로 간주하면, 다른 삶의 방식과 문화인식을 계몽의 대상이나 제거의 적폐로 여기게 된다.

문화에는 중심이나 보편의 잣대가 적용돼선 안 된다. 그러면 반드시 자신과 다른 상대의 문화는 옳음을 지향하더라도 천박하고 척결의 대상이 돼 충돌이 불가피하다. 주체와 객체의 다름을 존중하고 관계 속에서 새롭게 규정되는 주체를 전제해야,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변화하는 옮음을 인정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새로운 차이와 다름의 문화가 꽃필 수 있다.

개고기 식용 금지 문제는 대중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결정될 것이다. 문화의 형성은 그렇게 순조롭다. 비록 다수가 익숙했던 문화를 폐기하고 서양의 Pets 문화를 수용한다 할지라도, 다수가 옳다는 규정은 위험하다. 소수의 다름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20여년 전 ‘국토훼손’이란 명목으로 수천년간 이어져 온 매장 문화가 순식간에 화장 문화로 대체됐다. 한국 철학사상의 원형은 ‘밝음’에 있다. 밝음을 숭상해 반만년을 상장례에서 흰 옷을 주로 입었던 민족이, 이제 검은 옷을 입는다.

다른 종교ㆍ문화ㆍ사유 등과의 만남에서 익숙했던 것들이 공정하게 매도되지 않는 현상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의 근대는 그렇게 불공정했고, 여파는 여전하다. 다시금 문화의 공정한 만남과 융합, 그리고 창조를 기대한다. 개고기는 잘못이 없다!

고재석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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