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어릴 때 동화책을 사달라는 내게 어머니는 “책에서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하면서 책을 사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 말이 몹시 서운해서 나는 돌아서서 한참 울었다. 책 한 권보다 쌀 한 됫박이 더 소중했던 현실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이 말에 대한 해답은 내가 소설가가 된 뒤 평론집 『한국 문학의 위상』(김현, 문학과지성사, 1977)을 읽으면서 찾았다. 김현 선생은 이 저서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문학은 곧장 쓸모 있게 써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당장 무엇을 만들어 써먹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문학은 인간을 구속하지도 억압하지도 않는다. 여기에서 ‘쓸모 없다’는 의미는 ‘순수하다’ 또는 ‘자유롭다’와 통한다. 인간을 억압하는 건 인간에게 쓸모 있어 보이는 것들이다. 유용하기에 사람들은 아귀다툼해서라도 그걸 손에 쥐려 하고, 이 욕망으로 인간은 쓸모있는 것에 붙들려 자유로운 삶을 포기했다.

문학은 그 쓸모없는 눈으로 쓸모있는 걸 바라보며 ‘쓸모 있음’ 뒤에 감추어진 허상을 투시한다. 그리하여 쓸모있는 것으로부터 억압당하거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그 사슬을 풀고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오도록 부추긴다. 문학으로 곧장 무엇을 만들 수는 없으나 문학은 그렇게 사슬을 풀고 나온 사람들에게 향기로운 삶을 만들도록 해준다. 이것이 문학이 가진 힘이다. 문학의 이러한 속내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문학이 쓸모없는 게 될 것이고, 이 향기를 맡은 사람에게는 문학이 그 어느 것보다 강한 삶의 지혜가 된다. 이것이 문학의 총체(總體)며 문학의 기능이다.

하늘 한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2044>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2044>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2044>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2044>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 짝을 <2044> 잘라 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 도종환 시 <가죽나무> 중에서.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마지막 편에 가죽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벌판에 비뚤비뚤하게 자란 커다란 가죽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사람들이 쓸모없다며 내버려 둔 나무다. 쓸모없다고 여겼기에 이 나무는 오히려 제 결대로 잘 살아서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며 천수를 누렸다. 죽죽 잘 자라 쓸모 있다며 사랑받던 나무들은 모두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잘려나가 목재로 사라졌다. 유용한 걸 많이 쥐어서 돋보이는 게 아니라 온전하게 결대로 사는 게 올바로 가는 길(道)이다. 이런 나무들이 함께 모이면 아름다운 숲이 된다.

김호운 소설가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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