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1월 다보스포럼에서 미셸 부커 세계정책연구소 대표는 ‘회색 코뿔소’를 언급했다. 회색 코뿔소란 지속적인 경고를 통해 위험을 충분히 사전에 예측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이 대응에 소홀하면서 위기에 빠지는 것을 뜻한다.
코뿔소는 몸집이 매우 크다. 그래서 멀리 있어도 눈에 잘 띄고, 진동만으로도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코뿔소가 무섭게 달려오면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대처 방법을 알지 못해 당황하게 된다. 즉 위기의 원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를 회색 코뿔소라고 흔히 말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총 12번의 경기침체를 경험했다. 원인은 제조업 경기 위축, 석유 파동, 통화 긴축, 금융시장 불안, 재정 긴축 등 다양하다. 가장 최근의 경기침체는 코로나19로 발생했다. 이 중 가장 빈도수가 높았던 경기침체 원인은 연준(연방준비은행)의 통화 긴축과 금융시장 불안이었다. 공교롭게도 여의도 증권가에서 내년에 가장 불확실한 변수로 꼽고 있는 것도 연준 정책과 자산 거품이다.
미국 연준은 최근 FOMC 회의에서 자산을 매입해서 달러를 공급하는 ‘양적 완화 정책’을 줄여나가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에 따라 연준은 내년 하반기부터 자산매입을 멈출 계획이다. 다만, 파월 의장의 언급을 참작하면 유동성을 흡수하는 기준금리 인상 시점은 2023년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증권가에서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 때문에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시점이 앞당겨질까 노심초사다. 자산 거품 또한 걱정거리다. 국내 투자자들도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테슬라 등 미국의 빅테크 주식을 적극적으로 사고 있다.
최근 미국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은 50조 달러(원화 약 6경원)를 넘어섰다. 미국 명목 GDP대비 무려 2.2배를 웃도는 역대급 수준을 기록했다.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암호화폐의 시가총액은 한국거래소와 코스닥 전체 시가총액보다 더 커졌다. 아파트 가격도 천정부지로 상승 중이다. 아파트 가격은 월급을 모아서 살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자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근로자들의 조기 은퇴가 빨라지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근로 소득이 증가하는 속도보다 자산 가격이 더 빠르게 상승하면서 노동의 상대적 가치가 낮아졌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코로나19의 대유행을 예상하지 못했고, 코로나19는 마치 전쟁과 유사한 충격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각국 정부는 정책의 후유증을 고민할 겨를도 없이 엄청난 부양정책을 시행하며 유동성을 공급했다. 그 결과 자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폭등했고, 근로자들의 근로 의욕은 낮아진 결과를 초래했다.
이제 각국은 단계적 일상 회복인 위드코로나를 준비하고 있다. 기존에 과도했던 부양정책은 거둬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다. 각국 정부의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자산 가격들이 과도한 유동성 공급으로 급등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특히, 내년 자산시장에 가장 중요한 변수는 각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그중에서도 미국 연준의 통화정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연준이 회색 코뿔소가 될지 예의주시해야 한다.
오태동 NH투자증권 리서치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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