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사기>를 집필한 중국의 사마천이 그러했다.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절친이자 경쟁자였던 창애(蒼厓) 유한준(兪漢雋, 1732~1811)에게 보낸 편지글에 나오는 말이다. 창애가 <사기>를 다 읽은 기쁜 마음을 연암에게 편지로 전했다. 그러자 연암은 “<사기>의 내용을 읽은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으로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책을 읽을 때는 지은이의 마음도 함께 읽으라는 뜻이다.
나비를 잡기 위해 아이는 잔뜩 몸을 낮추고 엄지와 검지를 ㄷ모양으로 만들어 조심스럽게 나비에게 다가간다. 그러고 나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힘으로 나비를 잡아야 한다. 힘이 넘치면 잡은 나비에게 상처를 입히고 힘이 모자라면 나비를 놓친다. 넘치는 것보다 모자라는 게 더 낫다는 걸 알기에 아이는 자주 나비를 놓친다. 나비를 놓친 아이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주위를 한번 돌아보며 부끄럽고 아쉬운 마음을 혼자서 달랜다. 나비를 놓친 텅 빈 이 아이의 가슴에는 이제 세상을 담을 아름다운 꿈 하나가 싹을 틔울 것이다.
나비를 잡는 아이의 이런 마음이 세상에 <사기>를 남기게 했다. 우리 문학인들이 남기는 작품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러한 세상은 참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다.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 세상과 지혜를 쌓게 해준 자연을, 그 스승과 벗을 액자에 갇힌 좁은 잣대로 움직이려 하거나 거스르려고 하면 자연과 세상은 우리에서 멀어진다.
연암이 열하(熱河)로 갈 때 요동 땅 고죽성 옆을 흐르는 롼허강을 지나갔다. 함께 가던 사신 일행들이 빼어난 풍광을 보고 “산수(山水)가 그림 같다”며 감탄하자 연암은 “그대들은 그림도 모르고 산수도 모르네. 그림이 산수에서 나왔는데 어찌 산수를 보고 그림 같다고 하는가”하고 나무랐다. 자연을 보지 못한 채 산수화(山水畵)만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은 액자 속에 든 그 산수가 자연의 모든 것인 줄 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을 보지 못한 채 액자(틀) 안에 갇힌 시선으로 자연과 세상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아는 건 보고 배운 틀 속의 모양일 뿐이다. 그 작은 그릇에 세상을 다 담았다고 여기면 그릇은 깨지고 만다. 깨지지 않은 넉넉한 그릇을 가진 사람만이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세운다.
김호운 소설가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