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을 바라보는 관점(觀點)에 따라 사물(事物)의 모습과 내용이 달라진다. 관점이 다른 여러 사람이 본다면 이 사물은 여러 개 모습으로 각기 다르게 보일 것이다. 같은 사물을 보는 데도 관점이 다르면 이처럼 대상이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하나의 사물을 두고 사람마다 달리 말하는 건 관점이 달라서다. 낱낱으로 나뉘면 모두 진리라고 주장하나 총화(總和)로 보면 이처럼 오류로 뭉쳐있다. 올바르지 않은 관점이 혼돈과 혼란을 일으켰다.
올바른 관점은 내가 아닌 상대의 언어로 대상을 바라볼 때 생긴다. 장자(莊子)가 이걸 보았다. 남쪽 바다 임금 숙(儵)과 북쪽 바다 임금 홀(忽), 그리고 중앙 땅을 다스리는 임금 혼돈(渾沌)을 등장시켜 장자는 <장자의 혼돈> 이야기로 이 문제의 답을 만들었다. ‘숙홀(儵忽)’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숙홀은 ‘숙홀하다’의 어근(語根)으로 ‘홀홀(忽忽)하다’라는 형용사의 뿌리 말이다. 뜬금 없다거나 조심성 없이 가볍다, 혹은 빠르게 달린다고 할 때 이 말을 사용한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숙과 홀이 가끔 중앙의 혼돈 땅에 모여 즐겁게 한담하고 간다. 혼돈은 귀·눈·입·코가 없다. 마치 풍선처럼 생겼다. 귀·눈·입·코가 있는 숙과 홀은 겉으로 보고 듣고 맛보며 세상을 알지만, 혼돈은 귀·눈·입·코가 없으니 속으로 상대의 언어를 듣고 사물을 보며 마음으로 음식 맛을 봄으로써 세상을 이해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숙과 홀이 혼돈에게 하루에 한 개씩 구멍 일곱 개(귀·눈·입·코)를 뚫어준다. 마지막 일곱 번째 구멍을 뚫자 혼돈이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혼돈이 사라진 이때부터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숙·홀·혼돈이 사는 곳은 바다와 땅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혼돈을 중심에 둔 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겪어야 할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혼돈’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제각기 생각과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으며 장자는 이를 피할 수 없는 가치로 보았다. 부정이 아닌 긍정의 시선으로 혼돈을 정의(定義)한 것이다. 여기에서 장자는 자신의 언어가 아닌 상대의 언어로 대상을 바라보았을 때 그렇다는 지혜를 이 이야기에 담았다. 숙과 홀이 자기들 관점에서 구멍 일곱 개를 뚫어주자 혼돈이 죽어버린 건 그렇게 하면 세상이 혼란에 빠진다는 경고다.
‘나’의 언어가 아니라 상대의 언어로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우리는 나무를 보고 ‘나무’라고 하지만 정작 나무는 자신의 이름이 나무인 줄 모른다. 인간의 언어로 나무를 정의 내리고 그렇게 믿으라며 강요한다. 나무를 바라볼 때는 나무의 언어로 대화해야 한다. 나무도 우리처럼 자유로운 생명으로 자라고 있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며 그렇게 해야 관점이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이해하며 평화롭게 잘 살아갈 수가 있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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