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랬더니 상대가 꼭 잡더라고. 그 말이 여러 생각을 불렀다. 손잡기가 예사 인사지만 한동안 뜸했던 사이라 돌아뵈는 것이다. 말없이 서로의 밀린 마음을 나눴다는 것일까.
손은 잡는다는 것. 악수가 우리 전통 예법은 아니라도 일상의 인사법이 됐다. 다 알다시피, 손을 내어 마주잡는 악수는 믿음과 우애의 표현이었다. ‘내 손에는 무기가 없소’라고 빈손을 내보이며 맞잡은 게 서양식 악수의 유래라고 하듯. 퀘이커교도의 평등주의, 평화주의 운동에서 악수가 더 퍼졌다는 말도 있다. 칼이 없다는 표시든, 잘 지내자는 표현이든, 손잡기에는 서로의 마음을 함께한 세월이 들어 있다.
그런 악수를 거부하는 이도 있었다. 당신의 책을 사들고 온 독자의 사인 요청에는 기꺼이 응하면서도 악수는 웃는 것으로 사양했다. 오만 운운하는 수군거림에도 개의치 않았다. 우리네 전통 인사법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것, 서양식 악수를 사절하는 철학이었다. 남이 어떻게 보든 상관 않고 소신껏 행동하는 모습은 당시 신선해 보였다. 지금도 전통 인사법만 고수하는지는 확인 못해서 장담할 수 없지만.
악수에 불편한 기억도 따라 나온다. 문인들과 악수할 때 내 손이 거칠게 느껴져 악수를 꺼렸던 기억이다. 글 쓰는 남자들은 손이 왜 그리 부드러운지, 나도 모르게 물러서곤 했다. 강도 높은 쓰기노동이 느껴지는 펜혹의 손도 있었지만, 노동이라곤 모를 여린 손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다 자판을 두드리니 펜혹도 추억의 단어로 사라졌고 손의 느낌도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물일 많은 여성들은 거칠어진 손에 나이가 더 드러나니 ‘섬섬옥수’도 한때의 관형어로 추억될 뿐이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라는 노랫말도 일깨우듯.
손잡기를 톺아보니 여러 의미가 닿는다. 적조했던 사이의 손잡기도 새롭게 보인다. 짧은 시간의 스침 속에 마음 주고받기? 꼭 맞잡아온 손은 ‘이해해’ 같은 위로의 표현으로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반대편 입장에서 보면 단순한 인사라도 속이 좀 시끄러울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튼 누군가 손을 잡는 순간의 속마음 되짚기가 손의 중요성을 새삼 깨운다. 세간에는 더 크고 더 복잡한 손잡기가 오가는 중이니 복잡한 손잡기 너머 손절의 안팎도 다시 뵌다. 투표 전과 달라진 속내들이 그들 손에는 더 다양하게 묻어 다닐 것이다.
인간사 속의 손만 바쁘랴. 막 피는 꽃이며 풀이며 나무의 손은 더욱 분주한 철이다. 거기에 꽃다운 손잡기로 세상 골목이 환히 피어나는 모습을 얹어 본다. 그대 소매에 홍매화 향기가 시들기 전에 가 닿을 수 있을까. 봄빛 피는 공원에도 손을 내어 봄향을 귀하게 받아본다.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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