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무슨 죄인가. ‘개’를 붙인 명칭들 앞에서 했던 생각이다. 왜 개를 함부로 붙여왔을까. 개에게 묻지도 않고 허락도 안 받고. 개에게 미안해, 그런 심정도 있었다. 대상에게 묻지도 않고 마구 붙여온 시의 비유들처럼.
언젠가 〈개 같은 내 인생(1985)〉에 놀라 비디오를 찾아본 적이 있다. 스웨덴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영화였는데 재개봉(2021) 영어 제목도 ‘My Life as a Dog’다. 이런 제목에서 우리의 정서나 언어 습관이 짚이는 것은 개에 담아온 폄하 때문이다. 표준어사전에서 개-접두사를 찾아보면 예전부터 써온 낮춤의 표현이 다양하게 나온다. ①‘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개금 ②‘헛된’, ‘쓸데없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개꿈. ③‘정도가 심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개망나니. 그런데 개를 왜 낮춤의 접두사로 많이 써왔을까. 더 찾아봐야겠지만 무엇보다 말맛이나 폄하 효과가 큰 데서 비롯됐을 듯하다. 욕에 붙인 개는 말할 것도 없고, 개만도 못하다는 표현까지 한결같이 낮춤의 효과로 활용해온 것이다. 아무리 봐도 좋은 뜻의 개-접두사 활용은 없었던 것 같다.
이런 개-접두사의 남용을 다시 보면 반려견 동반자들이 집단적으로 불만을 제기할 법도 하다. ‘개는 훌륭하다’는 TV프로그램도 있은 판이니. 그럼에도 오랫동안 자리 잡은 말들은 쉬 바뀌지 않는다. 개오동, 개살구, 개복숭아 등에서 보듯 ①의 예는 여전히 많고, ②나 ③의 예도 흔히 쓰이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개를 사전의 풀이를 뒤집는 뜻의 유행어가 획기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개좋아’ ‘개웃겨’처럼 개-접두사를 최고의 표현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 또한 젊은 층 특유의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신조어 놀이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개를 낮춤으로 써온 기성세대는 선뜻 따라 쓰기도 어려운 개-접두사의 대반전이다. 말은 언중(言衆)이 쓰는 대로 시대를 타며 변한다.
최근까지도 수많은 말이 새로 나와서 무슨 뜻이고 활용인지 기울여보면 사라지기 일쑤였다. 새로운 말 사용법을 채 익히기도 전에 새 말이 나오는 등 유행 주기도 짧아졌다. 그런 특성을 유념해도 개-접두사만큼 놀라운 전도가 또 있었을까(좀 다르지만 욕을 부사로 즐긴 예도 있었다). 한편으론 개의 반전에서 통쾌함을 맛본다. 그 착하고 예쁜 개를 왜 비하에 써왔느냐는 항의도 살짝 느껴진다. 늘 쓰는 말에도 사람 중심의 편견이 얼마나 많이 깊이 들어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개좋아! 비슷한 부사(아주, 매우, 무척) 이상의 말맛이 분명 있다. 하지만 개를 안 붙여도 참 좋은 화양연화 같은 나날이다. 새록새록 피는 꽃과 잎만 봐도 눈부실 때, 덩달아 환히 피길 빌며 길을 나선다.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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