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기미 독립운동에 뒤이어 민족운동의 한 부분으로 발생한 것이 우리나라 소년·소녀 운동이다. 1921년 고(故)소파 방정환 선생이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면서 어린이 운동의 시초가 됐다. 방정환 선생은 일제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소년 운동 지도자들과 협력해암울한 대한민국의 미래와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언어, 문화 정책 역사적 사실까지 말살하려는 일제 만행에 울분을 일으켰다.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이란 부제(副題)를 달았다. ‘어린이를 내려다 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어린이를 가까이 하시어 자주 이야기 하여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敬語)를 쓰시되 늘 보드럽게 하여 주시오.’
훗날 사람들은 이를 두고 세계 최초의 어린이 인권 선언이라고 평가한다. 어린이 인권에 대해서 이처럼 조목 조목 정리해 발표한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라는 말의 사용과 어린이날 제정은 일제 강점기 아동 문학가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동화(童話)는 어린이 계몽 운동에 큰 효과가 있었다. 동화를 창작하고 번역 번안한 아동문학가 방정환은 어린이 인권이 철저히 무시된 채 억압받던 일제 강점기에 아동문화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천도교 교주이며 3·1운동 독립선언문 33인의 대표였던 손병희의 사위였던 방정환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교리에 따라 어린이를 인내천의 천사로 보았다. 수필과 어린이 예찬에서는 어린이를 더 할 수 없는 참됨과 더 할 수 없는 착함과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그 위에 또 위대한 창조의 힘까지 갖춰 가진 어린 하느님이라고 했다. 그가 아이를 인격을 갖춘 사회의 구성원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로 어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배경이다.
이어 그가 조직한 천도교 소년회는 어린이날 행사가 민족의식을 고양(高揚)할 것을 염려한 일제의 탄압으로 1939년부터 중단됐다가 광복 후인 5월5일로 변경됐다. 1931년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방정환 묘비명은 ‘동심여선(童心如仙)’이다. 아이의 마음은 신선과 같다는 뜻이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어린이날이 지났다.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이며 미래의 기둥이라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그리 행복하지 못하다. 과열된 교육에 마음껏 뛰어놀지 못하고 인격체로 존중 받지도 못하고 있다.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날 선언문을 돌아보게 된다. 말로만 아동 인권 운운할게 아니라 법제화가 절실한 지금이다.
이명수 동두천문화원향토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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