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빛 닮은 미술관 대문은 세계적 작가 알베르토 구즈만의 작품 ‘문’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잔디밭 ‘신세계’ 착각...‘노래하는 탑’엔 로댕의 조각상 ‘발자크’ 전시 본관 이어진 산책로 정겨운 조각품 눈길...1990년 개관후 조각의 방향성 제시
로댕의 열정 결정체 ‘발자크’와 마주하다
남양주시 화도읍 문안산 모란봉 아래 자리를 잡은 모란미술관(관장 이연수)은 푸르름에 싸여있다. 파란 하늘빛을 닮은 미술관 대문은 페루 출신의 세계적 작가 알베르토 구즈만의 작품 ‘문’이다. 5월 19일부터 김아타 초대전 ‘자연하다(ONNATURE)’가 열리고 있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잔디밭이 펼쳐진다. 몇 걸음을 걷지 않았는데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다. 미술관 중앙에 초대전이 열리는 본관이 있고, 본관 왼편에 연노랑 색깔의 수장고와 ‘노래하는 탑’이 서 있다.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높이 27m의 이 콘크리트 탑은 고(故) 이영범 건축가의 작품인데, 2003년 미국건축가협회 뉴욕지부로부터 디자인상을 받았다. ‘노래하는 탑’엔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상 ‘발자크’가 전시돼 있다. 로댕은 1898년에 대문호 ‘발자크’를 완성하고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들이 비웃는 이 작품,... 기를 쓰고 조롱하는 이 작품은, 나의 필생의 역작이며 미학적 동력이다. 이것을 창조한 날부터 나는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 곁에는 광화문 ‘충무공이순신장군상’을 조각한 고 김세중(1928~1986)의 조각상 ‘피에타’가 있다. 탑에 새겨 놓은 고 이경성 평론가의 ‘모란탑의 존재감-시심의 영토’라는 글을 통해 탑을 비스듬히 세운 작가의 뜻을 가늠해본다.
■ 조각의 숲에서 ‘자연하다’
본관으로 이어진 산책로에도 ‘가족’이나 ‘평화’ 같은 정겨운 조각 작품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놓인 최만린의 ‘태(胎)’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율동적이다. 속이 드러난 고목처럼 카페 곁에 서 있는 작품은 전국광의 ‘積(적)-만남의 장’이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녹음에 둘러싸인 미술관의 풍경에 빠져든다.
김유나 학예팀장의 안내를 받으며 김아타 초대전 ‘자연하다’를 둘러본다. “작가는 예술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전시회 주제가 ‘자연’이란 명사와 ‘하다’라는 동사를 결합한 ‘자연하다’입니다. 미국과 인도 등 세계 곳곳에 캔버스를 세워 놓고 수년을 기다렸다고 해요. 자연이 빚어낸 작품들이지요” 커다란 캔버스를 붉게 칠한 작품이 전시실 벽면을 가득 채웠다. 이어지는 공간에서 마주한 작품들은 온통 검은색이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표면이 거칠다.
군 당국을 설득하여 허가를 받고 사격장에 캔버스를 설치하여 포탄에 맞아 갈가리 찢긴 조각을 캔버스 위에 펼쳐 붙이고 붉은색과 검은색을 입힌 것이라 한다. 작품 옆에 부착된 작가의 말이 묵직하다. “포가 그린 그림이다. ...폭력의 역사도 자연이다. ...갈등과 야만의 역사도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의 역사이다. 군 당국의 허가를 받는데 3년, 작업을 하는데 3년을 집중했다. 3년을 침묵했다. 절망을 길게 사유했다. 검정했다. 빨강했다” 작가의 작업 방식만큼이나 해설도 파격적이다. 여러 해 동안 캔버스를 바닷물 속에 담가 두거나, 바람 부는 들판에 세워 두거나, 모래밭에 묻어두었다가 꺼내 어떻게 자연으로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작가의 말대로 ‘자연이 그린 그림’이다. 강원도 인제 숲속에, 제주도 유채밭에 캔버스를 세웠던 작가는 모란미술관 정원에도 캔버스를 세웠다. 앞으로 2년 동안 나무 그늘 밑에서 비와 바람을 맞으며 스스로 그림을 그릴 것이다. 이연수 관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김 작가는 모란미술관을 이렇게 소개한다. “삶과 죽음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는 곳, 있음과 없음이 같이 있는 환상적인 공간이다”
■ 삶과 죽음, 자연을 노래하는 조각 전문미술관
야외전시장은 볼거리가 더욱 풍성하다.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나무 아래로 조각 작품들이 곳곳에 있는 정원은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다. 뒷짐을 진 노인이 염소 가족을 이끌고 장터로 향하는 모습을 조형한 백현옥의 ‘장날’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아이들이 염소를 잡고 놀다가 쓰러뜨려 몇 차례 다시 세웠어요. 그래도 관장님은 울타리를 치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하세요” 한국 추상조각 1세대 작가 최만린의 ‘095-9’는 대지가 지닌 원초적 생명력을 추상성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한참 바라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작품도 있다. 김영중의 ‘사랑’이 그렇다. 임영선의 ‘사람들-오늘’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떠밀려가듯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단한 모습을 보여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1990년 4월에 문을 연 모란미술관의 개관전 주제는 ‘21세기를 향한 조각의 새 표현 전’이다. 이후 줄곧 조각의 현실을 진단하며 방향성을 제시해왔다. 2020년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의 주제는 ‘조각의 아름다움’이다. 조각으로 시작해 다시 조각이다. 1992년에 열었던 ‘국제조각심포지엄’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네덜란드의 마크 브루스,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페루 출신의 알베르토 구즈만 등 국내외 작가 9명이 한 달 가깝게 머물면서 미술관 마당에 마련한 작업장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모든 과정을 관람객들에게 공개하는 행사였다. 1995년에 ‘모란미술대상’을 제정하고 1997년부터 ‘모란조각대상’으로 장르를 특정해 격년제로 2007년까지 시행하여 역량 있는 조각가를 발굴 지원하였다. 개관 25주년을 맞은 2015년에는 건축과 설치, 조각을 아우르는 ‘모란 폴리 2015’ 국제공모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모란미술관은 한국 조각계에 획을 긋는 중요한 사업을 진행하며 질적 성장을 거듭해왔다. 이러한 일을 주도한 인물 역시 이연수 관장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30년 전 이처럼 외진 곳에 미술관을 세울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결혼하고 둘째 아이를 낳자마자 혼자 돌아다닌 곳이 화랑이었어요. 어느 날 한 작가의 그림 앞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지요. 그때 당시 공무원이었던 남편에게 나중에 돈 생기면 화랑 하나 차려달라고 부탁했어요” 이 관장의 남편 고 홍석웅 회장은 ‘민주화 운동가의 묘지’로 널리 알려진 한국 최초의 사설 공동묘지인 모란공원을 경영하며 부인 이연수 관장이 모란미술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도록 뒷받침한 인물이다. 이 관장은 지난 32년 동안 ‘돈 먹는 하마’인 사립미술관을 꿋꿋하게 지켜온 비결을 이렇게 말한다. “남편의 든든한 후원과 이 아름다운 공간에 대한 사랑이 지금까지 오게 한 힘인 것 같아요”
■ 어머니 품처럼 따스하고 편안한 미술관
이연수 관장은 국내 대표 조각가들과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돈이 없는 작가가 외국에 갈 일이 생기면 비행기 표를 끊어주고, 차가 없는 작가에게는 남편의 중고 자동차를 선물하기도 했다. 모란미술관은 조각계에서 어머니가 계시는 친정처럼 편안한 곳이 됐다. 고 김세중 조각가의 아내 김남조 시인, 화계사 국제선원장을 지낸 현각 스님 등 문화예술인은 물론 종교인들과도 폭넓게 교류하고 있는 이 관장은 15년간 모란미술관 고문을 맡아준 고 이경성(1919~2009) 평론가와의 특별한 인연에 감사한다.
스승의 역할을 해 주던 이경성 선생이 별세하자 선생을 미술관 옆 모란공원 묘지에 모셨다. 최태만·김종길·김성호 등 실력을 인정받는 평론가와 큐레이터들이 이곳을 거쳐 갔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이다. 이 관장은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숙명여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경기도박물관협회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장으로도 활동한 ‘여걸’이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는 이 관장의 태도와 말씨는 무척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는 작품을 살 때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본다고 한다.
“고 이경성 선생님이 알려줬어요. 작품이 곧 사람이라고. 작품 속에 작가가 녹아있는 거죠. 그래서 사람을 봐야 합니다. 30년의 경험을 통해 알고 보니 작품은 곧 작가의 인성 그 자체더군요”
미술관을 거닐며 조각 작품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홀가분해진다. 자연의 품에 안긴 모란미술관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아늑하고 따스한 위로와 휴식의 공간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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