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살 땐 장마나 더위에 그다지 신경을 써본 적이 없었다. 지하 차고에서 차 타고 연구실 가까운 데 주차 자리를 찾는 데에 신경이 가는 정도고, 더위도 대체로 어디 가나 맞아주는 에어컨 덕에 그 존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대관령에서 처음 장마를 맞고 그 뒤의 여름 더위를 맞을 것 같다. 다행히 아직은 도시에 살던 버릇이 그대로 유지될 정도로 신경이 쓰일 정도가 아니다. 아마 창문 넘어 펼쳐지는 산 덕이리라. 다만 골짜기에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끼는 나날들이 유난히 많다.
‘세상 환했을 때 세상 친구들로 가득하더니...묘하기도 하지, 안개 속 거닐기란...삶이란 외로운 것/아무도 다른 이 모르고/저마다 혼자구나(헤르만 헤서, 안개 속에서)’
마음도 몸도 청춘은 아니지만, 아픔 덕에 겸손해지고 김제 평야지대에서 태어나 산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는데, 안개 자욱한 산 덕에 다시 겸손해진다. 아프지 않을 때 세상을 내가 산다고 건방을 떨었지만 아픔 덕에 세상에 살 수 있어 고마움도 느낀다. 산에 와서야 아무 말도 없이 오만 가지 말을 다 들려주는 그 너른 품을 맛보고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산의 기운 덕에 힘이 생겼는지 세상 시끄러운 소리까지 들린다. 돌지 않는 권력은 지고 나르는 부패라는 말, 네 편 내 편 가릴 것 없이 새겨들어야 할 말 같다.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프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 7:12).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공자, 논어-위령공편).’ 이렇듯 동서양과 종교를 가릴 것 없이 다 일러 놓은 진리지만, 그냥 책 속의 진리일 뿐인가. 세상엔 참 똑똑한 사람 많고, 목소리 큰 사람도 많은데, 한 번이라도 자신이 비판하는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하듯이 해도 받아들이겠는가? 그래서 또 예수님은 남 눈 속 티는 보되 제 눈 속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하신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 다시 눈을 껌뻑이고 거울에 비쳐 보게 된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신경림, 장자를 빌려-원통에서).’ 무릇 위기 앞에서는 진영 싸움보다 위기 극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임란과 삼전도와 분단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 이곳 대관령 700고지 산속에서 지내느라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요즘은 위기가 다가오는 듯, 아니 한참 진행 중이 아닌가 싶다. 그게 위기가 아니면 좋겠지만, 위기인데 그걸 모르면 그건 그야말로 큰일이다. 올여름 장마가 끝나고 열대야로 밤잠 설치기 이전에 도시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는데, 허, 박무가 또 산을 뒤덮고 있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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