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로서의 인간과 자연과의 공생관계가 무너지고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 스스로 격찬했던 그 인간들이 조장하는 지구의 오늘과 미래는 암울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인재가 지구를 극심하게 병들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인간도 역시 병들어 죽거나 인재의 결과물로 인해서 불치병을 앓고 있다.
지구가 병들고 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그럴지라도 그 문제의 심각성에 둔감한 것 역시 인간이다. 이유는 문명의 발달이란 미명 아래 자연을 파괴하고, 지구의 온난화를 부추기고 있는 기계적, 자원적 재생의 의존성이 낮거나 생태계의 복원을 두고 한 계획과 활동이 전무한 것이 그 원인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닐 텐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은 망각 증세에 몰입돼 현재의 지구 상태를 진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시문학을 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지구의 상태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서정적 상관물로서의 소재와 주제를 설정해 문학행위를 하는 사람이고, 피조물로서의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위한 의미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 한 사람으로서 갖게 되는 안타까움이다.
이 아픔을 캐나다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시민운동가인 나오미 클라인은 다음과 같이 주지하고 있다.
“문제는 탄소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우리는 지금 엄중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기후 혼란이 세계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도록 지켜만 볼 것인가? 아니면 기후 재앙을 피하기 위해 경제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인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21세기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전의 현상을 향해 치닫고 있는 때에 자본주의 형태를 어떻게 바꿔 그 재앙을 면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지라도 절제와 변형의 해법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지금이라도 경제에 몸담고 있거나 정책을 입안하는 이들의 세기적 공동체가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이 문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야 함이 맞는 것이다.
이충재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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