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세상을 떠났다. 작고 맑아 보이는 인상을 가진 그분이 근 1 세기를 살아오면서 제국의 1인자라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화려해 보이지만 속은 편안하지 못했을, 그 자리를 지켜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인생 여정임을 짐작할 수 있다. TV를 통해 그녀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기 위해 거리를 메운 사람들을 보며 그녀가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 삶의 공과를 상세히 알지 못하면서도 절로 추모의 마음을 갖게 되는 건 동서(東西)를 관통하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얼마 전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앞에 있던 고목(古木)이 쓰러졌다. 폭우와 돌풍이 300여년은 족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큰 나무를 눕혔다. 파산서원은 학문(學文)으로 세상을 빛낸 동국 18현의 한 분이자 율곡의 도우(道友)로도 널리 알려진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위대한 인물을 모신 사당의 수호목처럼 남아 있던 나무는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고목이었고 그 후 30여년을 잎새 없는 나무로, 하지만 고고함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켜왔는데 결국 이별을 고하게 됐다. 문화재 당국은 서원과 함께 역사를 같이했던 이 고목을 과거의 이야기에 새로움을 더하는 문화상징(象徵)으로 남기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필자는 지금 대학자 율곡(栗谷) 이이 선생을 추모하는 ‘율곡문화제’를 준비하고 있다. 본가와 화석정이 위치한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서 살았고, 묘와 서원이 있는 사적 525호 ‘파주이이 유적’이 있기 때문으로 파주시에서 32회째 개최하는 유서 깊은 행사다. 지난달에는 명재상 방촌 황희 정승과 대학자 우계 성혼 선생을 기리는 문화행사를 연이어 개최한 바 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그간 접어뒀던 지역의 선현들에 대한 추모행사와 문화사업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선현들을 기억하고 그 정신(精神)을 기억하기 위한 사업들이 다시 이어짐을 보며, 형식의 변화와 상황의 다름은 있지만 훌륭한 삶을 살아낸 분들을 기억하고 존경의 마음을 나누는 것이 인류의 역사에 있어 보편적 미덕(美德)임을 생각한다. 선현의 가르침을 통해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하는 교훈을 간직하고자 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계속돼야만 한다.
지구상 저편에서 일어난 여왕의 서거와 애도를 보면서, 오래된 것의 가치(價値), 훌륭한 삶을 살다 간 이들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공유, 시대를 이끌어 온 거목(巨木)처럼 남은 지역의 선현들을 떠올리는 가을 날이다.
우관제 파주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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