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주위의 공기와 볕도 서서히 바뀌고 있는 계절이다. 봄과 여름의 비바람, 햇빛, 해충들을 다 견디고 대추, 감들도 익어가고 있다. 조만간 가로수와 숲속의 생명들도 잎과 열매를 떨구며 고운 이별을 맞을 것이다. 자연도 머물 때와 떠나야 할 때를 알듯이 우리들 삶도 머무름과 헤어짐이 이어진다.
2500년 전 중국에서도 ‘떠날 때’와 관련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토사구팽(兎死狗烹).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나온 부자들의 이야기인 화식열전(貨殖列傳) 중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역시 범려(范蠡)이다. 춘추전국시대 오와 월이 치열한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범려는 월왕 구천의 책사로 숙적인 오나라를 무너뜨린 일등공신이었으나 논공행상에서 높은 자리를 포기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오랜 동료인 문종(文種)의 만류에 토사구팽을 경계하며 주의를 당부하고 타국으로 가서 사업에 도전해 엄청난 재산을 모으게 된다. 89세까지 살면서 재산을 세 번 모으고 세 번 나누는 삼취삼산을 실행해 중국 역사상 첫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평가받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의 사업가들, 즉 화상(華商)들이 가장 닮고 싶은 롤모델로 범려가 손꼽히고 있다.
정치와 군사, 그리고 사업가라는 분야에 걸쳐 부와 명예를 모두 누리며 인생 3모작을 모두 성공시킨 완벽한 남자이면서 바로 인생의 최정점에서 물러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불굴의 의지와 처세술로 중국 최초의 대부호가 된 것이다.
범려가 재물의 신으로 불리게 된 비결은 다양하고 치열한 인생 경험을 통해 얻은 경험과 식객삼천이라고 할 정도로 주위에 후덕하게 베풀어 얻어진 고급 정보들도 한몫했다. 또 새롭게 도전할 만큼의 확고한 자기 철학이 더해져 사람과 사물, 시대의 흐름을 읽는 남다른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비즈니스도 때를 아는 것이 성공의 핵심 요소다. 시세 변동에 따라 물건을 사고팔면서 돈과 물건을 회전시키는 것처럼 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물러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업에서의 타이밍은 손실과 이익에 직결되는 것이고 권력에서 때를 알고 물러나는 것은 화를 방지하고 명예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시의 한 구절이 더욱 와 닿는 것이 아니겠는가.
베이비붐세대와 파이어(FIRE)족까지 다양하게 새로운 삶에 도전하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다. 대부분 지속가능한 삶을 꿈꾸면서 자연인, 또는 자유인을 꿈꾼다. 좀 더 미련을 갖고 뭉그적거리다 어쩔 수 없이 밀려 떠날 수도 있고 자유 의지로 계획을 세워 떠날 수도 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는 용기는 어려운 일이고 타이밍을 잃고서 내려놓는 것은 진정한 비움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서 있는 곳, 심어진 곳에서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다가 자유 의지로 새로운 도전을 위해 내려놓고 떠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용기가 아닐까.
때를 알고 용기 있게 떠난 범려와 그냥 남아 있다가 토사구팽 당한 문종, 이 두 사람의 ‘같은 시대 다른 삶’을 보니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읽어야 한다는 노자의 도덕경 9장이 와 닿는다. “가득 채우면 흘러 넘친다. 재물이 과하면 지키기 어렵고 자리가 높고 교만하면 비난 받을 일이 생긴다. 일을 이룬 뒤에는 뒤로 물러서라, 그것이 하늘의 길이다.”
오형민 부천대 비서사무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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