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분노에 이유 타당한 경우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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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종 경기대 행정복지상담대학원 원장

지난 주말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로 온 국민이 가슴 아프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안전사고가 터지면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참사의 원인 규명과 대책 마련에 대한 주문이 무분별하게 쏟아진다. 사고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의 잘못인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더 세게 밀라고 했던 사람 때문이라는 의견부터 정부나 경찰의 무능 때문이라는 의견, 심지어 핼러윈 축제에 참여한 MZ세대(희생자들도 포함됨에도 불구하고)의 문제라는 세대(世代) 비난론까지. 게다가 참사 발생 초반 애도 분위기 때문에 잠잠했던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참사의 책임 여부나 소재에 대해 마구잡이식 주장을 배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민들의 슬픔이나 아픔과 관계없이 오로지 정치적 계산에서 판단할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런 정쟁(政爭)은 그렇지 않아도 힘든 우리에게 절망을 넘어 환멸을 느끼게 한다.

너무 참담한 사고였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슬픔이 큰 사고였기에 우리는 참사 발생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분노의 대상을 찾으려고 한다. 오죽 힘들면 그럴까.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냉정해져야 한다. 이 분노감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따져 봐야 한다. “분노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지만, 이유가 타당한 경우는 드물다”라는 프랭클린의 말처럼, 자칫 잘못하면 분노가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참사처럼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우울감 또는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같이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적 불안감은 분노감(또는 분노감 조장)에 쉽게 전염된다. 이럴 때 우리는 “미움의 이유는 정확해야 한다”는 영국의 시인 오든의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미움의 대상(참사 유발자)이나 미워하는 근거(참사의 원인)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분풀이하듯 쏟아내는 말이나 글은 결국 우리의 슬픔을 강화시키고 아픔을 연장시킬 뿐이다.

감정은 휘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누그러진다고 한다. 분노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의 분노감을 개인적 원망이나 진영 논리에 의해 무가치한 (분노)감정으로 휘발(揮發)시킬 수 없다. 이는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그토록 아픈 대가를 치르면서 만들어진 이 분노 감정을 이번 참사와 같은 비극을 막고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는 소중한 계기로 승화시켜야만 한다. 이럴 때 비로소 공분(公憤)이 집단지성에 기반한 진정한 사회운동의 동력으로 작동될 수 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

최순종 경기대 행정복지상담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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