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원로배우 전성시대, 그 묵직한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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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20세기 초 러시아의 저명한 연극 연출가이자 연기 이론가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1863~1938)와 스타니슬랍스키의 사실주의 연극 기법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연극의 선구자 이해랑(1916~1989)이 살아있었어도 지금의 한국적 연극 상황을 감지하진 못했을 것 같다. 전례 없는 ‘원로배우 전성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이 현실을.

순수예술 장르를 대표하는 연극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주인공이 연기에 한창 물이 오른 30, 40대의 배우가 아닌 70대 이상의 원로배우라는 사실은 한편으론 놀라우면서도 그것의 함의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무대에서 열정을 쏟아붓는 원로배우들의 행보는 데이터로 확인된다. 티켓 예매 사이트인 인터파크에 따르면 올 들어 11월 현재까지 연극 티켓 판매 점유율 중 70대 이상의 배우들이 주연을 맡거나 조연으로 등장한 연극들이 대거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유명세를 탄 오영수(78)와 신구(80)가 주연한 ‘라스트 세션’이 전체 5위를 기록한 것을 비롯해 박정자(80), 손숙(78), 전무송(81) 등이 출연한 ‘햄릿’ 6위, 오영수와 박정자가 출연한 ‘러브레터’ 18위, 신구와 정동환(73), 서인석(73)이 주연한 ‘두 교황’은 19위에 각각 올랐다. 90세를 바라보는 이순재(88)가 백일섭(76), 노주현(76)과 함께 열연 중인 ‘아트’ 역시 흥행 순항을 하고 있다.

예전에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원로배우가 주연으로 나선 연극이 큰 관심을 끌면서 티켓 파워를 과시한 사례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일부 공연에 국한됐다. 올해처럼 연기 경력 50년 이상(이순재는 66년의 연기 경력을 갖고 있다)의 원로배우들이 대거 연극계에 뛰어들어 흥행몰이를 주도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연극의 대중화 기여라는 측면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 등 대중적인 영상매체를 통해 익숙한 유명 원로배우의 농익은 연기는 연극의 주 관객층인 20, 30대 여성은 물론 연극 장르에 무관심했던 중·장년층을 공연장으로 이끌면서 문화예술 콘텐츠의 기초가 되는 연극의 저변 확대에 일조한다.

그럼에도 놓쳐선 안 될 지점이 있다. 원로배우들의 활약이 연극을 넘어 공연예술 전반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동력이 돼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작품의 흥행 못지않게 신인 연기자를 육성하고 전문 배우의 연기력을 키워야 하는 숙제가 문화예술계, 특히 공연예술계에 주어져 있으나 해법이 난망하다, 더구나 이 같은 상황에서 흥행을 위해 유명 배우와 지명도 높은 연출가를 앞세운 이른바 ‘스타 마케팅’이 공연 제작의 공식처럼 고착화된다면 연극적 토양은 척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로배우 전성시대는 공연예술 발전의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하다. 나이를 잊은 원로배우들의 거침없는 활동이 연극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촉매제가 됐다면, 남은 과제는 코로나19 이후 위축된 공연계를 돌아보고 발전을 도모하는 데 모아져야 한다. 원로배우의 역할은 무대에 머물러선 안 된다. 이들의 연기적 노하우와 혜안을 정책 당국의 의지와 접목해야 할 때가 왔다.

김진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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