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백성을 사랑한 임금
영릉에도 늦가을의 정취가 가득하다.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효종대왕의 영릉(寧陵) 사이로 난 ‘왕의 숲길’은 언제 걸어도 좋다. 한민족의 문화를 말살하려 광분한 일제도 감히 조선 왕릉은 훼손하지 못했다. 조선 왕릉 42기 중 북한에 소재한 2기를 뺀 40기가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왕릉 중에서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의 영릉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왕릉이다. 세종대왕의 동상을 비롯해 세종시대의 천문과학 기기들이 재현 설치되어 있는 영릉은 교육장으로도 손색이 없다. 경복궁과 광화문, 한글박물관 등 세종과 관련된 공간이 서울에도 많지만 세종대왕을 깊이 만나려면 여주 영릉을 찾아야한다.
■ 기록화로 만나는 세종대왕의 일대기
영릉 입구에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관람객들이 많다. 그러나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공간이다. 아니다. 세종을 제대로 만나려면 반드시 둘러봐야 할 소중한 공간이다. 우리의 눈에 익숙한 세종시대의 기록화를 비롯한 소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에는 3개의 상설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 영상실, 카페,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상설 전시실은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실은 주제가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이고 제2실의 주제가 ‘북벌의 기상 효종대왕’이다. 1실과 2실 사이에 있는 전시실의 주제는 ‘세계유산 조선왕릉’이다. 전시실 입구에서 처음 만나는 것은 동판에 새긴 ‘훈민정음’ 서문이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세종의 말씀을 다시 음미해 본다. 우리가 세종을 존경하는 까닭은 여럿이지만, 무엇보다 그 바탕에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 곧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한 장의 그림이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1418년 9월19일, 경복궁에서 22세의 청년 세종 이도(1397~1450)가 조선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하는 광경을 묘사한 ‘즉위도’(김학수 작)이다. 흥미로운 역사적 장면이 또 펼쳐진다. 이번에는 중년의 세종이 왕세자(문종)와 함께 측위기를 관측하는 신하들과 서 있는 ‘측우기도’(권영우 작)이다. 한국 최고의 발명자로 꼽히는 장영실은 누구일까? “모두 8점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처럼 품격 높은 그림은 앞으로 제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의 양웅열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전시된 기록화 8점은 영릉을 성역화 하던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이루어진 국가사업이었다. 여러 명의 학자들이 독서하고 토론하는 광경을 그린 ‘집현전 학사도’(장우성 작)와 독서에 열중하는 세종의 청소년기 모습을 담은 ‘왕자 시절의 독서도’는 학문을 좋아한 세종의 모습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무인들이 등장하는 그림이 더 많다. ‘대마도 정벌도’(서세옥 작)와 ‘육진 개척도’(박노수 작), ‘이만주 정벌도’(정완섭 작) 같은 기록화를 통해 세종시대의 찬란한 문화는 활달한 기상과 강력한 국방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림 제목이 ‘지음도’(이유태 작)인 까닭은 무엇일까? “세종이 천재 음악가 박연의 편경 연주를 듣고 바로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던 일화를 알려주는 그림입니다. 음악에도 천부적 재능을 가진 세종은 우리의 전통 음악 아악을 정리하고 ‘정간보’라는 악보를 창안하여 ‘정대업’과 ‘보태평’ 같은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금속활자를 제작하는 ‘주자소도’(정완섭 작)는 출판문화를 꽃 피운 세종의 업적을 알려준다. 우리가 일상에서 지폐로 만나는 세종의 얼굴은 정우성 화백이 그린 세종 표준 영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같은 서책을 만나 볼 수 있다. 특히 세종실록에 실린 ‘경상도지리지’는 엄청난 크기가 관람객을 놀라게 한다. 터치스크린을 통해 책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혼천의 등 천문 관측기구와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 앙부일구, 물시계 자격루 같은 옛 과학기구의 작동원리를 영상을 통해 확인하는 것도 재미있다. 휴대용 해시계와 세종대왕의 어보도 전시되어 있으니 찾아보자. 세종은 박연과 함께 우리 음악을 정립한 주역이다. 세종과 박연의 음악적 재능과 업적을 알려주는 악기 ‘편경’을 살펴본다. 천재 음악가 박연이 우리나라에서 난 돌로 편경을 새롭게 제작하여 시연할 때, 세종이 소리가 이상하다고 지적한다. 박연은 정말 돌을 덜 갈아 소리가 둔탁했던 사실을 발견하고 감탄한다. 이처럼 세종은 절대음감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세종대왕의 일대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영상은 학부모들도 감상하면 좋은 내용이다.
■ 북벌의 기상 효종대왕과 특별전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머네!’
효종대왕은 형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649년에 조선의 제17대 왕으로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복구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효종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북벌을 국가의 목표로 삼았던 군주이다. 효종대왕의 영릉을 섬세하게 묘사한 펜화는 색다른 감동을 준다. 대동법, 북벌, 나선정벌 등 주요업적에 대한 설명이 애니메이션과 패널로 구성돼 있다.
“효종의 북벌의지는 송시열의 ‘기해독대’에 잘 나타나는데, 효종은 ‘정예로운 포병 10만명을 길러 기회가 있을 때 오랑캐들을 곧장 공격할 것이며, 이 일은 10년 안에 추진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시관 관계자의 설명처럼 효종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대동법의 확대, 상평통보의 유통, 농서와 의서 편찬 등으로 나타난다. 제주도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한 사업도 빼 놓을 수 없다. 조선을 탈출한 하멜이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작성했다는 ‘하멜표류기’에 실린 한 장의 그림이 눈길을 끈다. 하멜 일행이 효종대왕을 알현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 간 유물 중 2011년에 반환된 외규장각의궤 중 효종대왕의 비인 ‘인선왕후의 국장도감의궤’도 특별한 유물이다. 국장행렬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영상을 통해 당시 왕실의 장례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세종대왕유적관리소는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로 기획전을 열고 있다. ‘성군이 태어나다-세종대왕의 탄생’(2017), ‘세종대왕이 사랑한 학자들’(2018), ‘조선 국왕의 즉위식’(2018), ‘조선시대 한글서체의 아름다움’(2019), ‘영릉에서 제례는 이렇게 지내요’(2019), ‘조선 효종대왕의 문예적 소양’(2019), ‘조선시대 해시계와 앙부일구’(2020), ‘세종대왕의 왕자들’(2020), ‘효종과 하멜 이야기’(2021), 2022년 상반기 기획전시 ‘세종, 우리 옛 땅을 되찾다’가 두 달 동안 진행됐다.
■ 여주 영릉에서 나를 만나는 여행
현재는 열리고 있는 2022년 하반기 기획전의 주제는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머네!’이다. 입구에 ‘재통지심 일모도원’이란 붓글씨와 만난다. 이 글씨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을까? “효종은 재위 8년이 되던 해에 영의정을 지낸 백강 이경여(1535~1657)가 올린 상소에 답하면서 ‘진실로 가슴에 심한 한이 서려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이다’라는 자신의 심경을 밝히지요.” 효종이 송시열과 만나 국가정책을 논의한 ‘독대설화’는 북벌정책에 관한 내용이 중심이기에 오랫동안 은밀하게 전수된 비밀문서이다. 효종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끌려갔던 김상헌의 문집 ‘청음선생집’, 송시열의 문집인 ‘우암선생집’ 같은 서적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효종 추상존호 옥책’ 같은 희귀한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제3실은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영릉을 참배하기 전에 들러야 하는 공간이다. 왕릉의 공간은 어떻게 구분되었는지, 석물의 명칭은 무엇인지 흥미롭게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거쳐 영릉을 참배하면 분명 감동이 배가될 것이다.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지만, 영상으로 왕릉을 조성하는 과정을 친절하게 전달하기 때문에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자연 풍광이 수려한 여주에는 문화공간도 풍부하다. 목아박물관, 여주미술관 등 여주에 소재한 예술 공간을 순례하는 여행을 기획해보면 어떨까.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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