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개입하면서 유엔군은 청천강과 장진호전투에서 참담하게 패퇴했다. 이후 서울까지 중공군에게 내줬다. 그 뒤 유엔군은 평택-원주-삼척 선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1951년 2월 반격에 나섰다. 선더볼트 작전, 라운드업 작전 등이 그것이다. 반격 작전은 인접 부대의 진격 속도에 맞춰 모든 전선에서 천천히 진격하는 형태로 진행됐고 유엔군의 반격 작전에 공산군 측도 공세로 대응했다.
유엔의 반격 작전 중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공세에서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게 지평리전투다. 2월13~15일 진행된 지평리전투는 불리하던 전세를 역전시키고 유엔군의 사기를 진작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인천상륙작전과 용문산전투 등과 함께 6·25전쟁의 판세를 뒤집은 3대 전투로 꼽히는 지평리전투가 72주년을 맞았다. 양평군은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올해 기념식을 오는 16일 지상작전사령부와 함께 개최하고 그날의 승리를 되새긴다. 행사에는 군 고위 관계자는 물론 전투의 주축을 이뤘던 미국과 프랑스를 대표해 양국 대사도 참석한다.
■ 지평리전투는?
양평 중심지에서 동쪽으로 14㎞ 지점, 지름 3㎞가량의 분지 안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 지평리다. 이 작은 분지에서 6·25전쟁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지평리전투는 1951년 2월13~15일 프랑스군 대대가 포함된 미군 제23연대의 유엔군과 중공군 3개 사단이 사흘간 벌인 전투다. 당시 미 제9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지평리에 남게 된 제23연대는 라운드업 작전을 위해 편성된 전투단이자 중공군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역할을 했고 중공군은 그 미끼를 물었던 것이다. 중공군은 이 지평리에 제39군 예하 3개 사단을 투입했다. 좌우 인접 부대가 철수하면서 고립됐던 제23연대는 1.6㎞ 길이의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전투에 대비했다.
2월13일 저녁, 중공군 2개 사단이 전방 2개 대대에 8차례에 걸친 파상공격을 가해 왔으나 미군은 이를 모두 격퇴했다. 다음 날인 2월14일 오후 7시, 중공군은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다시 일제 공격을 시작했고 중공군 1개 연대 병력이 방어선을 돌파해 진지 내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미군과 프랑스군이 진지를 사수하면서 중공군은 새벽녘에 철수했다. 지평리전투를 상징하는 프랑스군의 총검 돌격도 이날 전투에서 이뤄졌다. 프랑스군은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공군에 맞불로 승부해 진지를 지켜내며 최대의 위기를 넘겼다.
2월15일에는 아침부터 교전이 벌어졌고 이날 오후 미 제5기병대가 후방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며 제23연대와 전선을 연결해 중공군을 퇴각시켰다. 당시 제5기병대 특임대는 공격 개시 1시간15분 만에 6마일의 거리를 뚫고 지평리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지평리 동쪽에서 한국군 제5사단과 제8사단 등을 붕괴시킨 중공군의 공세는 지평리에서 좌절됐다.
미군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의 치열한 저항과 후방의 화력 지원, 중공군 자체의 문제 등으로 중공군은 물러서게 됐다.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유엔군이 300여명에 불과한 반면 중공군은 5천여명에 달했다. 지평리전투 승리로 1950년 말의 연이은 패배로 떨어졌던 유엔군의 사기는 다시 고무됐다. 지평리전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화력과 견고한 방어진지로 물리친 최초의 전투가 됐다. 이후 자신감을 되찾은 유엔군은 다시 북진을 재개했다. 지평리전투는 3개월 뒤 벌어진 용문산전투에서 승리해 현재의 휴전선을 확보하게 한 동력을 준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 양평군, 기념관 건립... 매년 기념식도 개최
양평군은 1·4후퇴 이후 중공군의 총공세를 막아내고 거둔 첫 승리인 지평리전투를 기념하는 기념관을 2015년 건립했다. 지평리전투기념관(전시공간2)은 지평면 월산리 일대 군유지 2만7천305㎡에 을미의병의 최초 거병을 기념해 만든 을미의병기념관(전시공간1)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6·25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는 곳은 경기도에서 양평군이 유일하다. 지평면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분격한 유생들이 일으킨 을미의병이 최초로 일어난 곳이자 지평리전투가 벌어진 곳이어서 군민들이 ‘호국의 메카’로 자부하고 있다.
양평군은 역사 속의 지평리전투를 재조명하고 살아 숨 쉬는 향토유적으로 남기기 위해 기념관을 건립하고 호국테마파크를 조성했다. 을미의병기념관(전시공간1)은 ▲의향(義鄕) 양평 ▲일제의 침략과 저항의 역사 ▲항일의병의 효시, 지평의병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는 밤 ▲꺼지지 않는 희망, 양평 의병전쟁 ▲푸른눈의 이방인이 본 지평의병 등 6개 테마로 구성돼 있다.
지평리전투기념관(전시공간2)은 ▲6·25전쟁의 타임라인 ▲새로운 전쟁 그리고 1·4후퇴 ▲전환점의 시작 ▲기다렸던 승전보, 지평리전투 등을 주제로 꾸며져 있다. 양평문화원도 ‘지평리를 사수하라’ 등 책자를 발간하며 전쟁의 역사 속에서 태어난 굵직한 이야기와 역사가 시사하는 교훈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평리전투는 결코 잊어서도 버려서도 안 되는 역사라는 이유에서다.
양평군은 매년 2월 지평리전투기념관에 있는 전적비 앞에서 전승기념식과 전몰장병에 대한 추모식을 연다. 군과 지역 참전용사회, 국방부 등 국내 유관기관은 물론 주한미군사령부와 프랑스대사관 등 지평리전투 당사자들이 모여 이 전투에서 산화한 호국영령을 기린다.
추모식에선 적군(敵軍)인 중공군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도 진행된다. 공식 행사의 순서에 없기 때문에 본행사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박하게 진행되지만 중공군의 위패를 모셔 놓고 넋을 기리며 향불을 피우고 술을 올린다. 위령제는 서로 총부리를 겨눴을지도 모르는 6·25참전용사회의 노병들이 자발적으로 지낸다.
전진선 양평군수는 “위령제는 화해와 평화를 위해 대가 없이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령하는 놀라운 사례”라며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평리가 실천해 온 위령은 평화적 행동의 실천이자 인도주의의 표상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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