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해가 지지 않았지? 한국은 영화제가 끝나지 않아.” 예전 해외 어느 영화제에서 영국 영화인을 만나 던진 농담이다. 실로 그렇다. 올해 영화진흥위원회에 접수된 국제영화제 지원 사업 대상 단체가 15곳, 국내 영화제 지원 사업 대상 단체만도 59곳이라고 한다. 여기에 각 지방자치단체나 독립기관에서 ‘영화제’라는 이름을 건 각종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경기도 최북부에서 부산, 제주도까지 전국 곳곳에서.
1990년대 중후반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영화제는 상업 영화관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작품들을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창구이자 신진 감독들의 등용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영화계에 찾아온 위기는 영화제 역시 비켜가지 않는 모양새다. 관객들이 영화관을 좀처럼 찾지 않고 감독과 스태프들이 영화 현장을 떠나 OTT 작품의 현장에서 길을 찾는 시점에 영화제 역시 여러 질문을 받고 있다. 결국 하나로 수렴되는 질문이다. 어째서 영화제가 필요하냐고.
영화의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는 보루. 새로운 언어를 발굴하는 실험대. 이런 설명의 설득력이 예전과 같지 않은 시점에서 나는 영화제가 만들어 내는 공동체에서 답을 찾고 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내가 하는 일의 80%는 결국 설득이다. 한국과 각국 창작자들의 작품을 본 다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당신의 영화가 들어올 만한 곳이라고 설득한다. 그러고 나서는 관객을 설득할 차례다. 이 작품이 왜 중요하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와서 보라고 설득한다. 그런 1년간의 준비가 끝나면 일주일 남짓한 기간 동안 세계 각국의 창작자와 관객들이 한곳에 모여 함께 영화를 본다. 모두가 하나의 장소에 모여 숨죽이고 같은 스크린을 응시한 후 불이 켜지면 대화를 나눈다. 세계 어디에선가 일어난 사건에 관해서, 그것을 기록하고 재창조한 감독의 작품에 관해서, 그리고 그것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 관해서.
함께 본다는 것. 그것이 바로 20세기를 목전에 두고 태어나 21세기를 맞이하며 죽음을 위협 받는 영화의 핵심이다.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장치를 발명한 에디슨과 뤼미에르 형제 중 후자가 영화의 창시자로 평가 받는 것은 그들의 장치가 관객들이 함께 영화를 보도록 고안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우리가 배워 왔고 꿈꿔온 가장 건강한 사회의 구성 원리와 닮아 있다. 창작자와 영화, 관객을 매개하는 영화제의 공동체는 일시적이고, 불균질하고, 때로는 연약하다. 그래서 지켜야 한다. 이 사회엔 확신에 찬 전진만큼이나 고뇌에 차 비틀대는 걸음도 필요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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