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학살 피해자 최대 3천명 추정, 미발굴지도 많아 신원 미상의 유해 33구 발견… 軍 3년 조사 “모두 민간인” 여주시유족회, 하동 평화공원서 매년 추모하고 위령제
#1. 여주시 능서면 용은리에서 홍○국, 홍○태 형제가 인민군에 의해 총살당했습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당시 박○순이 희생되자 박씨네 집안에선 “이게 다 홍씨 집안의 밀고 때문이다”라고 주장했고, 두 집안 간 대립이 시작되면서 인민군이 홍씨 형제를 끌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 우리가 다시 수복하게 되면서 홍씨네 집안이 보복에 나섰습니다. 결국 박씨네 집안도 부역자라며 몰살당했습니다. (이○호 구술)
#2. 김○분은 여주시 가남읍 심석1리 월편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1950년 7월18일 논일을 하던 남편에게 참을 지고 가다가 가남교회와 가남읍사무소 사이에 있는 태평리 다리 부근에서 미 공군기의 폭격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 달 뒤 옆 동네 신해리에서도 미군의 폭격이 두 차례 더 있었습니다. “화장실을 가던 노인의 장죽 담뱃불을 보고 폭격했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습니다. (이○식 등 2명 구술)
2020년 6월, 여주에서 지역 내 한국전쟁 전후 상황에 대한 구술 조사가 이뤄졌다. 당시 전쟁의 피해를 눈과 귀로 몸소 겪어 온 고령의 구술인 122명은 80년 전에 가까운 경험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앞선 사례처럼 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를 본 민간인은 셀 수 없이 많다. 현재까지 정확한 인명 수도 파악되지 않는다. 단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서를 보면, 여주지역에서는 9·28 수복과 1·4 후퇴 직후(1950년 9월~1951년 2월) 최소 98명의 민간 희생자 수가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지역 안에서는 최대 3천명에 달하는 희생 혹은 학살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6·25 정전 70주년을 맞는 올해, 여주를 중심으로 경기도 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해 살펴봤다.
■ 주민 제보로 국방부 발굴 시작…3년 만에 종결 “전부 민간인”
지난 2010년 5월. 여주시에 살고 있던 한 마을 주민이 국방부에 제보했다. “능서면 왕대리 골짜기 길에 옛 방공호 터가 있는데 그곳에 전사자들 유해가 대거 매장돼 있다”는 게 골자다.
이듬해인 2011년 5월 3~4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현장에 나와 이틀간 발굴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숟가락, 비녀, 여주농고 배지, 단추, 허리띠 등 유품들과 함께 신원 미상의 유해 33구가 확인됐다.
3년간의 조사를 마친 2014년 4월4일. 국방부 측은 유해의 나이와 유품, 발굴지점 등을 토대로 유해가 ‘국군’이 아닌 ‘민간인’으로 결론내렸다. 이때 유해는 모두 여주장례식장에 임시 안치했고, 2015년 2월9일 충남 금산의 서대산 추모공원으로 이관됐다.
하지만 지역사회에서 반발이 일었다. 왜 우리 고향에서 나고 자란 우리 가족들이 타지에 묻혀 있어야 하느냐는 목소리였다. 이에 여주시는 33구의 유해를 다시 지역 내에 모셔 오기로 했다. 시와 유족회 등 관계자들은 2018년 8월20일 환향제례를 열고 유해들을 여주박물관 수장고에 안치했다.
마침내 2023년 6월7일. 33구의 유해 중 1구의 신원이 밝혀졌다. 문병하 어르신(76)의 부친인 문홍래씨(당시 40세)다. 수장고에 보존 중이던 ‘증 4호’와 ‘증 12호’에서 같은 DNA가 검출됐다. 아버지의 우측 넙다리뼈 유전자와 아들의 구강 유전자가 일치했다.
문병하 어르신은 “어머니께서 얘기해주신 적이 있다”면서 왕대리 방공호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1950년) 6·25가 발발하면서 인민군이 6개월간 여주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부락마다 인민위원회가 조직됐는데 이들이 마을 이장이던 아버지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고 ‘주민들을 모아 와라’고 지시를 했다고 한다. 이를 거부하면 반동분자로 몰릴 수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주민들을 소집했지만, 나중에 9·28 수복이 이뤄진 후 아버지는 도리어 ‘인민군에게 부역한 자’로 색출됐다. 결국 방공호로 끌려가 학살당하셨다. 그래서 국방부 유해발굴단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가 있겠다’고 확신했다”고 설명했다.
■ 전쟁 아픔 깃든 평화공원, 이젠 추모 위령제 열린다
현재 여주에는 왕대리 옛 방공호 부지 외에도 민간인들이 집단 희생됐을 것으로 예측되는 미발굴 부지들이 있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여주시유족회(이하 여주유족회)는 ▲장풍리 골짜기 ▲버시고개 ▲대왕사 계곡 ▲매류리 고령토 구덩이 ▲봉골산 ▲가남지서 뒷산 ▲복대리 공동묘지 등을 거론한다. 발굴이 이뤄진 적 없다 보니 얼마나 많은 수의 희생자가 있을지도 미지수다.
이 같은 정보는 여주 양섬지구공원 내 ‘평화공원’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여주시 하동 398에 위치한 평화공원 역시 전쟁의 아픔이 깃든 장소다.
남한강 줄기를 따라 드넓은 백사장이 자리했던 이곳은 과거 전쟁으로 학살당한 민간인들이 모였다고 전해진다. 짚으로 얼굴을 씌우고 새끼줄로 손목을 묶어 양섬으로 이동한 뒤, 물살이 센 이곳에서 시신이 휩쓸려 가도록 방치했다고 한다. 전쟁 범죄를 갖추기 위한 의도였다고 추정된다.
그래서 지금은 평화공원에 원혼비 등이 세워졌고 추모공간도 조성돼 있다. 해마다 9~10월 가을이 되면 여주유족회를 중심으로 위령제도 열린다.
이인수 여주유족회 사무국장은 “평화공원은 여주지역 전쟁사에 있어 상징적인 곳”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고령화로 전쟁 피해자 유족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민간인 희생자를 기억하는 일은 더 이상 ‘유족만의 아픔’이어선 안 된다. 그걸 후대에 알리기 위한 장소가 바로 평화공원”이라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현대사를 잊지 않도록 다양한 교육을 진행해 좌·우 진영논리가 아닌 ‘공존하는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 비단 여주뿐만 아니라 경기도와 각 시·군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문병하 선생님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깜짝 놀랄만한 토픽”이라며 “현대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이 학살당하고 희생됐다는 사실들을 근거해 주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부연했다.
■ 72년 만에 아들 품으로…市 “6월30일 유해 인계”
왕대리 한 곳에서 발견된 70여년 전 유해만 33구. 심지어 12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야 1구의 신원만이 힘겹게 드러났다. 나머지 32구에 대해, 그리고 여주 안팎 여타 민간인 희생자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경기도 내에서는 여주 외에도 김포, 안양, 고양 등지에서 민간인 희생자를 찾고 기리기 위한 시민단체들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잠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여주유족회는 여주지역을 필두로 여타 지역과의 교류도 계획하고 있다.
특히 여주유족회는 지자체와 논의해 왕대리 유해 32구 등을 추모공원에 안치하는 방식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전해진다. 시 측에서도 대상지로 여주추모공원을 고려 중이다.
한편 여주시는 오는 7월7일 오전 9시30분 문홍래씨의 유골을 문병하 어르신께 인계한다는 방침이다. 이충우 여주시장이 직접 전달에 나선다.
시 관계자는 “과거 국방부는 33구 유해가 군인이 아닌 민간인임을 알고 여주경찰서에 관리 소관을 넘겼다. 경찰 입장에서도 이들의 신원이 명확하질 않아서 여주시에 무연고 처리를 의뢰했었다”며 “결국 그동안 문홍래씨도 ‘무연고자’였던 셈인데 이제라도 가족을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여주유족회 등과 상의해 향후 다양한 지원책 등을 모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병하 어르신은 “늦게나마 아버지를 찾게 돼 하루하루가 설레고 행복하다. 벅찬 가슴을 억누를 길이 없다”며 “어머님 산소에 함께 봉안해 드릴 테니 이젠 하늘나라에서 어머님, 누님, 형님과 함께 편안하게 지내시길 두 손 모아 절을 올린다”고 전했다.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