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방하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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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진세 칼럼니스트·에세이스트

조주(趙州) 스님은 선문답(禪問答)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스님을 찾아와 고통을 호소하는 제자에게 “방하착(放下着)하라”, 즉 “내려놓아라”라고 했다. 제자는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라십니까”라고 하자 스님은 “그러면 착득거(着得去)하시게”라고 했다. 마음속의 욕심과 집착, 분별심을 버릴 수 없다면 지고 가라고 한 것이다.

 

스님은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짓눌린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누구나 자유인이 된다. 미워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갖고 싶은 마음, 모두 내려놓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집착에 빠져 힘들게 살아간다. 그럼 살면서 주로 무엇에 집착하는지 유형을 살펴보자.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生者必滅·생자필멸). 생과 사는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다. 둘은 항상 상호작용한다. 태어나서 죽지 않으면 지구는 유지할 수 없다. 진시황은 영생을 원했지만 결국 죽었다. 부처님도 죽었고, 알렉산더 대왕도 죽었다. 그 누구도 영원한 삶을 살 수 없다. 서산대사는 “태어나는 것은 구름 한 편 일어남이요, 죽는다는 것은 구름 한 점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會者定離·회자정리).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따라서 영원한 사랑도 없다. 욕심 내고, 미워하고, 사랑을 독점하고, 이별을 잊지 못하는 것 모두 집착이다. 집착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집착을 모두 내려놓고 자연의 섭리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다. 사랑을 이유로 상대를 구속하는 것은 집착이다. 사랑과 이별은 다른 것이 아니고 같은 존재다. 어찌 이별 없는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랑할 때 이별을 대비한다면, 헤어짐을 쉽게 받아들인다. 단언컨대 영원한 사랑은 없다.

 

노자는 그의 저서 도덕경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가르친다. 자연 속에서 인생을 배우라고 했다. 자연을 거슬러 살아가면 큰 재앙이 뒤따른다. 인위적(人爲的)인 삶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돼 있다. 무위적(無爲的)으로 자연에서 배워 살아가는 것이 방하착하는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자연의 섭리에서 인생을 배우는 지혜가 필요할 때다.

 

불교의 핵심은 고해(苦海)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삼독(三毒), 즉 탐진치(貪瞋癡)를 버리는 것이다. 삼독을 버리고 세상사의 이치를 깨달아 열반(涅槃)에 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 불교다. 욕심 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모두 집착에서 오는 것이다.

 

민들레 씨앗은 바람이 실어다 주는 곳에서 싹을 틔운다. 민들레는 새싹을 틔울 자리를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척박하기 그지없는 콘크리트 틈 사이에서도 꽃을 피운다. 사람처럼 흙수저 금수저를 따지지 않는다. 자연을 배우면 삶이 행복하고 풍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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