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인간관계 생명론-감성 불공감

이기태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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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적이고 주관적이어서 나를 표현하는 데 충심인 예술의 분야는 다양하다. 예술은 그 다양한 분야에서 주체와 객체 그리고 여건에 따라 사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가 하면 비관에 빠지게도 한다.

 

그러나 그 다름을 구분하는 민감도 정도와 그 정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표현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언어에 대한 유전적 탁월성과 훈련의 배경 정도는 물론 문화적 배경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봄을 맞아 주변은 다양한 색깔로 치장될 것을 기대한다. 노란 색깔을 표현하는 형용어를 따져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말은 ‘노리끼리’, ‘누리끼리’, ‘노르스름’, ‘누르스름’, ‘샛노란’, ‘누런’ 등 마음의 감정을 싣는 다양한 색표현이 가능하다.

 

상황에 따르는 색깔의 섬세한 차이의 구분이 어려운 문화는 ‘병아리색’, ‘유채꽃색’ 등 정형화된 피사체를 활용해 소통한다. 사실 이 정형으로 규정된 색은 심리적, 물리적 등의 상황 여건에 의해 색을 수용하는 객체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바른 뜻을 반영하지 못한다. ‘싱가포르 저녁노을(Singapore Sunset)’이라는 색은 그 객체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을까마는 싱가포르에서 일몰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 색에 의한 느낌을 공유하지 못할 것이다.

 

케이팝 아이돌이 한류를 이끌고 있다. 한류를 즐기는 세계인은 각자 그들의 음악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 감성의 다양함 속에 이르는 깊이는 각자로 하여금 김밥을 즐기거나 한국어까지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강도를 주거나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정도 등 다양할 것이다.

 

타고난 문화예술의 감성과 수용성 정도에 따라 그 음악을 혼자 즐기거나 꼭 친구를 끌어들여 함께 즐겨야 만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한류는 세계 어디에나 있는 ‘병아리’의 색으로 정형화되며 공감된다. 감성이 아닌 감성도 있다. 한류라는 트렌드에 자신을 띄워 그 흐름 자체를 즐기는 개체, 흐름의 부류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싶은 개체, 그 흐름의 부류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불가피하게 속하는 개체 등 문화 예술 자체보다는 사회 시스템이 중요한 개체도 있다.

 

예술적 감흥에 스스로가 행복할 정도로 감성과 수용성이 큰 공연이라면 삶의 질이 높은 사회다. 그러나 그 감성과 수용성은 내 형질보다는 주변에 의한 사회적 영향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면 조용한 인위적 행복으로 그쳐야 한다. 나의 형질과 개성에 솔직해진다면 공연한 부추김으로 다른 사람의 감성을 힘들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에는 나의 본질과 정직함을 버리고 ‘따라오라!’나 ‘따라가자!’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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