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삶의 신비

이국진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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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아니면 무’. 그랬다. 필자는 젊은 시절 무엇을 선택할 때 가치 기준이 매우 명확했고, 좋고 싫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가치 기준을 좀처럼 바꾸지 않는 것에 대해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자부심마저 들었다. 때론 그것이 나를 상징하는 아이덴티티로 여겨질 만큼 스스로 꽤나 만족해하던 때도 있었다.

 

부끄럽게도 그것이 독선이고, 무지요, 어리석음이었음을 이순이 다 돼서야 깨달았다. 어떤 사안의 진위나 진실을 밝히고자 할 때 부조리한 사회 구조와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선과 악, 흑과 백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흑과 백이 동시에 공존하는 경우 또한 무수히 많다. 흑도 백도 아닌 회색지대의 논리도 있고 때론 사실과 진실이 모호하기만 해 해석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게다가 그것은 매우 가변적이기도 해서 어제의 진실이 내일은 새로운 진실로 대체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하나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분을 전체로 알고 살아가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신체의 기능과 순발력은 떨어졌지만 수십년의 경험을 통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과, 문제가 생기면 여러 선택지 중에서 최선의 방법을 적용해 해결하는 지혜도 어느 정도 생겨났다.

 

처음 난초를 선물받고 누군가에게서 난초 키우는 방법을 전해 들었는데 양동이에 물을 받아 난초 화분을 담그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처음 선물받은 난초를 비롯해 이후에도 몇 그루의 난초들이 꽃 한번 피우지 못한 채 시들어 죽고 말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선물받은 난초를 보면서 키우는 방법을 이전과 다르게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화분 안에 영양제를 넣은 후 일주일마다 물을 화분 위에서도 주고 동시에 양동이에도 반나절 담갔다. 그렇게 키운 지 얼마 안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난초의 꽃대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라오더니 꽃봉오리 속에서 아주 싱싱하고 많은 꽃이 활짝 피어나 필자를 기쁘게 했다.

 

일상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사용하던 살림 도구에서조차 어느 순간 더 좋은 용도가 떠오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수년 혹은 수십년에 걸쳐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다양하게 체득한 경험들이 대뇌 어디엔가 차곡차곡 쌓였다가 각기 다른 경험들끼리 서로 연결하고 아이디어를 주고 받으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리라. 득도하듯 어느 한순간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게 되는 놀라운 경험이다. 그것은 깨달음 같은 것이다.

 

삶이 신비하게 느껴진다. 젊음을 잃으니 지혜를 얻는다. 문이 닫히니 또 다른 문이 열리는 것이다. 앞으로의 삶의 여정 속에서 또 얼마나 성장하고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될지 몹시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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