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더하기] 경기도 독립기념관

정겸 시인•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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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가을 들녘을 가르며 화성시 궁평항으로 떠나는 자동차의 행렬이 평화롭다. 그러나 이 길은 한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일제에 항거한 피로 얼룩진 독립항쟁의 길이었다.

 

1919년 3월28일은 사강 장날이었다. 따라서 인근 지역의 면민들은 자연스럽게 장터로 모여 들었다. 당시 관할 주재소는 3월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문 낭독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 가는 거족적 만세운동과 3월21일 동탄면의 만세운동, 3월26일 사강리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만세시위를 빌미 삼아 상점 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송산·서신·마도면민 등 1천여명이 합류, 격렬한 만세 시위를 했으며 급기야 분노한 시위 군중들이 강경 진압하는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를 살해했다. 이후 독립만세운동은 향남 발안 장터와 장안, 우정면으로 빠르게 확산돼 시위 행렬은 2천500여명에 달했으며 일본 군경의 총칼에 격렬하게 맞섰다.

 

당시 체포된 애국선열들의 재판기록을 보면 ‘다음에 언급한 자들은 1919년 4월3일 수원군 장안면, 우정면내에서 조선독립운동에 가담하고 각 동리 사람 약 2천500명을 선동해 조선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두 면사무소의 유리와 창문 및 서류상자, 책장, 의자 따위를 파괴하고, 그곳에 비치된 장부와 서류 따위에 불을 질러 태웠다. 또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에 불을 질러 전소시키고, 그곳에 근무하는 순사 천단풍태랑(川端豊太郞)을 살해한 범인을 인치하고 이에 보고 한다’로 돼 있어 단순한 독립만세 시위가 아니라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항쟁이었다.

 

화성시가 발간한 3·1운동사에 따르면 일본 군경들은 자국의 형사들이 살해되고 시위가 확산되자 보복의 일환으로 1919년 4월15일, 향남 발안장터 만세시위 사건 인근에 있는 제암리에서 15세 이상 성인 남자를 교회에 모이게 했다. 불참한 사람들을 강제로 불러 모아 교회당을 포위하고 창문을 통해 안으로 일제히 사격을 했다. 그런 다음 예배당에 짚더미를 넣어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바람이 세게 불어 교회 아래쪽 집에 불이 옮겨 붙었고, 군경들은 위쪽 집에 불을 질렀다. 그로 인해 2명의 부인을 포함해 23명이 그곳에서 순국했다. 그 후 제암리 너머 고주리로 이동해 6명을 살해, 결국 29명이 순국했다.

 

잔악무도한 일제에 희생된 화성시 3·1운동사의 아픈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화성시의 독립운동사는 다른 지역보다 저평가됐다. 이에 화성시장은 기존의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지난 4월15일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으로 확장 개관했다.

 

이런 가운데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경기도 독립기념관 건립‘ 추진 의사를 밝혔다. 9월26일에는 도담소(옛 도지사공관)에서 이종찬 광복회장, 김호동 광복회 경기도지부장 등 관련 인사들과 회동, 건립과 관련된 논의를 했다.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다른 어느 지역보다 아픔과 상처, 그리고 큰 희생을 치른 화성시민들은 화성시장과 함께‘경기도 독립기념관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성지(聖地)인 화성시에 건립되기를 고대(苦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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