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경 성공독서코칭센터 대표
20여년 전, 국내 유명 어학당에 다니던 외국인들에게 우리말 가운데 그 뜻을 제대로 알기 전까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한 낱말이 무엇인지 들었던 적이 있다. 여러 답변 중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옷’과 ‘물집’이다. 옷은 사람이 땅에 발을 딛고 서서 두 팔을 벌린 것 같은 모양 자체가 재미있고 환영한다는 느낌이 들어 좋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해 그 이후 옷이라는 글자를 쓸 때마다 옷이 나를 반기는 기분이 들어 혼자 웃곤 했다.
물집은 꽤 의외였다. 뜨거운 것에 데거나 벌레에 물려 피부가 부풀어 오르면서 생기는, 쓰라리고 아픈 느낌의 물집이 그들에겐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물’과 ‘집’의 뜻을 알고 두 낱말을 연결해 투명하고 동그란 물방울 모양의 집을 떠올린 것이다. 그들이 물집의 제 뜻을 모른 상태에서 혹시라도 피부 상처인 물집을 매개로 나와 함께 대화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아마 서로 엉뚱한 이야기만 나누는 동상이몽이 벌어졌을 것이다. 말과 글로 소통하려면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것뿐만 아니라 제대로 잘 쓸 수 있어야 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느꼈던 경험이었다.
올해 초 콘텐츠 개발 회의 중에 수석연구원이 요즘 문해력 저하는 비단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초등 4학년 첫째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알림장 문구 중에 ‘중식’이라고 써오던 걸 ‘중식(점심식사)’으로 표기한다든지 괄호 안에 따로 낱말 뜻풀이가 달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단다.
아동이든 성인이든 사회 전반적으로 문해력과 독서력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음은 1990년대 중반부터 줄곧 인지하고 있던 터라 새삼스럽지 않았으나 자세한 사례들을 듣고 보니 흘려들을 일이 아니었다. 급식 메뉴를 왜 중식(중국 음식)으로만 제공하냐며 항의하는 학부모가 있다는 뉴스 기사도 봤으나 실제로 그런 일이 필자 주변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하니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다. 문해력 저하 문제는 단순히 낱말의 뜻을 알고 쓰는 차원이 아니라 소통 부재 현상과 이어지고 부정적 사회 문제로도 비화될 여지가 있기에 가볍게 여길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서교육을 전공했고 30년 가까이 독서 현장에 종사해 왔기에 문해력 저하 문제를 단시간에 해결해 줄 방안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전문가라고 해서 ‘단번에’ 문해력을 향상시킬 방법이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문해력은 보편적 언어 교육 외에도 학습자의 언어 감수성과 개별 특성의 영향을 받는 데다 시간과 노력과 경험이 켜켜이 쌓여야 길러지기 때문이다. 문해력 전문 교육을 받으면 실력이 나아지겠지만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기에 쉬운 선택지는 아니다.
그래서 누구나 일상에서 실천 가능한 문해력 향상 비법을 하나 알려주고자 한다. 평소에 잘 듣고 깊이 생각한 후 정돈해 말하며 다양한 글을 제대로 읽고 짧은 글이라도 꾸준하게 쓰는 습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 또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문해력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한 후에 전문적 교정을 받아야 하는 수고로움에 비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말과 글에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담아 표현하며 다른 이와 소통하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문화를 전수한다. 생각과 마음이 있다 해도 이를 표현할 만한 말과 글이 없었다면 인류 문화가 이렇게까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벨탑 시절부터 인류에게 수천개의 말이 있어 왔으나 문자는 몇 백개뿐이었고 현재 일상에서 쓰이는 것은 한글을 포함해 겨우 60여개뿐이라고 한다. 고유어로 말하고 듣고 고유의 문자로 읽고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문화의 힘이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다.
한글날이 있는 10월의 어느 저녁, 멀리 스웨덴으로부터 우리 말과 글로 창작하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기쁜 마음과 함께 최근 대두되는 문해력 저하 현상의 심각성이 떠올랐다. 우리 말과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점점 심해져 전 세계인이 공감하는 우리 문학작품을 정작 우리가 알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런 우려가 단지 기우이길 바라며 평소에 잘 듣고 깊이 생각한 후 정돈해 말하며 다양한 글을 제대로 읽고 짧은 글이라도 꾸준히 써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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