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학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얼마 전 타계한 컨트리뮤직의 거장이자 배우인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미국 문화계에 끼친 그의 깊은 영향력은 밥 딜런과의 관계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0년대 중반 컨트리뮤직의 본거지 내슈빌에 정착한 후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건물 관리인으로 일할 당시 일곱 번째 앨범인 ‘Blonde On Blonde’의 녹음 작업에 빠져 있던 딜런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경험이 그와 딜런의 첫 인연이었다. 음악적 성공 이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크리스토퍼슨은 열렬한 팬임을 자처하며 딜런과 음악적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둘이 함께한 본격적인 첫 작업은 음악이 아니라 영화였다. 시작은 실존 인물인 무법자 ‘빌리 더 키드’를 다룬 샘 페킨파 감독의 서부극 ‘관계의 종말(원제 Pat Garrett & Billy The Kid·1973년)에 크리스토퍼슨이 캐스팅되면서부터다. 당시 감독은 크리스토퍼슨의 음악적 색깔이 빌리 더 키드의 강렬한 남성미, 그리고 자유롭지만 고독한 영혼과 반항적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주저 없이 그를 낙점한다. 이후 크리스토퍼슨은 감독에게 딜런을 영화 사운드트랙 작곡가로 추천했는데 딜런의 타이틀곡을 들은 페킨파 감독은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게다가 딜런의 시적이며 반항적인 이미지가 감독이 추구하는 서정적이면서 폭력적인 서부극 분위기에 잘 녹아들 수 있을 것이라며 또다시 설득해 이번에는 ‘앨리어스’라는 캐릭터를 딜런에게 연기하게 했다. 이 영화에서 딜런이 작곡한 노래 중 하나가 바로 ‘Knockin' on Heaven's Door’다. 후에 이 노래는 딜런의 대표곡 중 하나이자 버디 무비의 상징적인 음악이 된다.
1962년 발매된 첫 번째 앨범 ‘밥 딜런’은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하지만 1963년 발매된 두 번째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은 달랐다. 여기에 수록된 노래 ‘Blowin' in the Wind’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노래는 단순한 멜로디에 깊이 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산문 형식으로 담아내 미국의 60년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시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의 상징적인 곡이 됐다. 혹자는 이 노래가 발표된 그해가 바로 미국에서 ‘60년대’라는 용어가 선취한 새로운 문화적 현상의 시작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카운트다운에 돌입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Blowin' in the Wind’는 딜런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폴 로브슨의 ‘No More Auction Block’ 멜로디를 사용해 작곡했다. 노예제도에서 벗어나기까지 수없이 죽어간 흑인들의 영혼을 달래는 동시에 거기에서 벗어난 그들의 자유를 이 노래는 축복한다. 하지만 그들이 맞이한 것은 60년대에 만연한 인종적 불의다. ‘짐 크로우 법’. 흑백 인종 간 분리를 합법화한 이 법은 그들이 자축하는 자유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Blowin' in the Wind’는 이런 면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깊고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20세에 불과한 백인 남성이 당시 흑인들이 느꼈던 혼탁한 좌절감을 정확하게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짐 크로우’는 1830년대 백인이 검은색으로 얼굴을 덧칠해 흑인을 연기하는 코믹극, 민스트럴쇼의 한 캐릭터 이름이다. 130여년이 지난 뒤 딜런은 백인이 노래로 흑인의 정서를 덧칠해 그들에게 영적인 위로를 선사한 전혀 다른 의미의 ‘짐 크로우’가 됐다. 앞에 이름과 뒤에 이름 사이에 고독하지만 자유분방하고 저항의 힘을 지닌 문화적 빌리 더 키드가 존재한다. 크리스토퍼슨과의 교류로 딜런은 인종과 문화 사이에 놓인 거대한 공감의 다리를 더욱 예민하게 깨달은 것이다. 그의 노벨 문학상은 그 다리 위에 서서 역사의 자각과 자기 존재 탐구의 미묘한 균형을 끝끝내 감지하려 한, 의미 측정이 불가능한 질문과 끈기를 향해 안도의 박수를 보낸 것일지 모른다. 나는 한강 작가의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 이유도, 어쩌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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