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사이를 다시 보는 ‘사이사이’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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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은 사이가 더 느껴지는 달이다. 1과 1이라는 숫자의 나란한 모습에서 사이를 시각적으로 확연히 보듯. 어쩌면 가을과 겨울 사이에 낀 느낌의 인상이 그렇게 구체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입견을 접고 일상의 거리만 훑어도 한층 멀어지는 나무들에서 사물의 사이를 실감한다. 잎이 지면서 나무들도 가지 사이를 더 드러내고, 그렇게 비어가는 곳곳의 사이들이 휑하니 쓸쓸해 보이는 것이다. 그 곁을 지나는 사람들 어깨 사이나 바람의 걸음 사이도 더 성글어지는 느낌이다.

 

문득 사이를 되짚는 것은 세간의 사이들이 더 보이는 계절 때문이다. 어떤 이미지에 걸려 그에 따르는 연상들을 곱씹듯 사이의 사유며 사달 같은 게 겹쳐온다. 사이는 시간이며 공간의 간격만 아니라 사람이나 사물의 관계나 거리 같은 것들을 포괄해온 말이다. 사이 속의 다면이 새록새록 손을 흔드는 즈음, 간명한 단어에 얼마나 많은 함의를 담아 왔는지 되작이게 된다. 그 말에서 시각과 촉각과 청각 같은 인지와 시간이나 공간의 감각들을 다시 본다. 11월의 이미지로 불러본 사이라는 표현이 그 안팎에 서린 정서적 거리감이며 서정적 표현까지 조곤조곤 깨우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이루는 게 생의 궤적이지 싶다. 바로 직전까지 더없이 좋은 사이에서도 자칫 마음 상하는 말을 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사이를 만들듯 사이는 종종 어떤 일을 발생하고 파생한다. 그런 사이가 만드는 사달 중에서도 세상 센 것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관계의 과시가 아닐지. 누구보다 끈끈한 관계를 바탕에 깔고 엮는 사이에서 자칫 부정적인 일로 연결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남이 아닌’ 사이로 혈연보다 깊어지다 함께한 일에서 문제로 비화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우리 일상은 연약해 새로 잇거나 자르는 세상의 사이에 따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고 복잡한 영향을 받는 게다.

 

때로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거미줄 같다. 생존을 위해 먼 데까지 줄을 치고 거기서 먹이를 얻고 아름다운 문양도 이루지만 센 바람이 닥치면 끊어지는 거미줄 말이다. 세간의 관계 설정이나 거리 조정이나 사람 사이를 함축해온 줄의 유지는 그만큼 어려움이 많다. 현대인의 사이는 5년마다 재조정된다는 말이 있었는데 사이라는 연줄의 다면이 상황에 따라 자주 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관계의 사이사이를 더 복잡하게 타고 사는 이즈음은 재조정의 시기가 더 짧아졌을 법하다. 갈수록 마음이 아주 편한 사이만 오래 다독이며 함께 사는 세상이랄까.

 

그러면서 돌아본다. 요즘 저자와 독자와의 사이는 어떠한가. 독자에서 저자로 가는 머나먼 꿈을 실현해도 마음에 두었던 독자와의 사이는 대부분 더 멀고 지난하다. 책도 신문도 많이 나오는 만큼 예전 종이책이며 신문이 누리던 호시절은 회복이 어려운 시절이다. 최근에 노벨상 선정 소식이 나오자 수상 작가 책을 사려고 줄 서는 모습에서 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런 열풍만도 저자와 독자 사이의 회복에 기여하려니 믿어본다. 그렇게 책갈피 사이를 높이는 마음의 온도를 등불 삼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나날을 건너기도 하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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