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더하기] 독립운동가 김상옥 선생의 명예선양 방안

혁신단 조직·혁신공보 발행 등 독립투쟁
독립유공자 서훈을 1등급으로 상향하고
생가복원·기념관 설립 등 보훈문화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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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열 한국보훈포럼회장·영남이공대교수

올해는 106주년 삼일절,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 중 대표적인 인물로 일제 경찰 1천명과 처절하게 싸우다 순국한 ‘동대문의 홍길동’이라 불리는 김상옥 선생을 소개하고자 한다.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을 국가보훈부 공훈록을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김상옥 선생은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태어나 20세 때 동흥야학교를 설립해 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이전부터 종사하던 철물공장을 설립해 이윤을 분배하던 그는 이종소·임용호·손정도 등과 사회계몽·민족독립에 대한 일을 의논하고 실행했다. 백영사를 조직하고 금주·단연 운동을 크게 전개하며 말총모자 공장을 설치하고 국산 모자의 생산·보급에 힘썼다.

 

그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윤익중·신화수·정설교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혁신단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를 발행·배포해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1920년 봄에는 만주에서 들어온 군정서원 김동순과 만나 암살단을 조직해 적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의 직접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계획했다.

 

그해 8월에는 미국 의원단 일행이 서울에 들어오는 기회를 이용해 한우석등과 함께 의원단이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하차하기를 기다려 시위와 총격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의원단의 서울 도착 전날에 일부 동지들이 붙잡혀 실패했다.

 

그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그해 10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김구·이시영·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지도와 소개로 중국의 지사들과 교유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투쟁을 펼쳤다. 1921년 일시 귀국해 군자금 모집과 정탐의 임무를 수행했고 1922년 겨울 의열단원으로 폭탄·권총·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동지 안홍한·오복영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했다. 이때 그는 의열단장 김원봉을 통해 서울에 있던 의열단원 김한과의 연락 협력을 당부받기도 했다.

 

그리고 동지들에게 연락하며 거사의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 1월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으며 이후 일경을 피해 10여일간 은신하다가 1월22일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장렬히 순국했다. 순국 후 1924년 상하이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은 전(傳)을 지어 간행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살펴본 바와 같이 김상옥 선생은 그 공적이 뚜렷하고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커 국민을 대상으로 명예 선양 방안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방안을 몇 가지 제시하면 첫째, 김상옥 선생의 경우 독립유공자 서훈 등급은 현행 2등급인 대통령장으로 선생의 공적과 활동을 보훈학적 관점에서 면밀히 연구해보면 1등급인 대한민국장으로 충분한 자격이 인정된다. 이를 위한 방안으로 김상옥 선생 기념사업회에서는 서훈 등급 상향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국가보훈부에 기존 신청한 자료 외 독립운동과 관련해 국가기록원, 일본 외무성, 신문 등을 활용해 더 많은 새로운 거증 자료를 추가해 올해 광복절에 맞춰 1등급 대한민국장으로 서훈을 인정받도록 한다.

 

둘째, 생가 복원 및 기념관 설립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방안으로 서울시에서 먼저 예산을 확보한 후 국가보훈부에 국비를 신청해 늦어도 생가 복원은 2028년, 기념관 설립은 2030년에는 이뤄져야 한다.

셋째, 올해 80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국회 정책세미나 및 정기적인 학술포럼 세미나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김상옥 선생을 소재로 한 뮤지컬이나 연극 공연을 제작해 국민에게 나라사랑정신 함양 등 보훈문화 확산에 기여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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