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원 세종사이버대 한국어학과 교수·한국어교육원장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소설 ‘작은 아씨들’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품으로 이 소설이 등장한 시기에는 보기 드문 여성서사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드라마와 영화 등에서 다양하게 재해석되고 있는 이유다. 원작 소설은 가난한 마치(March) 가문의 자매들이 백인 남성 중심의 보수적 사회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이 점에서 문화비평 영역에서는 ‘작은 아씨들’을 페미니즘 비평이론의 관점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렇다. 적어도 문화비평 분야에서 페미니즘은 특정 대상을 혐오하거나 조롱하기 위함이 아닌 그런 대상을 재해석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그래 왔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혐오의 단어가 됐고, 이는 그러한 경향의 사람들을 ‘페미’라고 부르며 낙인을 찍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는 아무래도 페미니즘을 단순히 특정 경향의 집단으로 오해하고 정치적으로 악용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페미라는 조롱의 표현으로 전락하기까지 여러 과정과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의 톨레랑스를 성찰하고 인식적 탄력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바는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대중이 페미니즘을 단순히 남성 혐오 정도로만 인식하는 것과 달리 문화비평 이론에서 정리하는 페미니즘의 사적 전개 과정은 복잡다단하다. 19세기부터 1950년대까지의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참정권, 아프리카계 영국·미국인의 권리 신장 등을 주도한 1세대 페미니즘의 성격을 띤다. 즉,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를 표방한 것이다. 이후 페미니즘은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노동 문제에 입각한 급진적 성격으로 전개되고 1990년대 이후부터는 좀 더 다양한 계층과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의 권리운동과도 결탁해 포스트모던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 같은 페미니즘 이론은 대중문화 속에서 ‘타자화’된 소수자들에게 우선 주목한다. 즉, 가부장적 전통사회의 남성과 같은 특권층이 주체화된 문화 속에서 여성 같은 소수자가 부당하지만 자연스럽게 객체화되는 고정성과 보편성을 비판하며, 배경으로 밀린 그들을 중심부로 소환해 목소리를 돌려주고 그것을 전경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흔히 대중문화 속에 재현되는 소수자의 이미지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 또한 소수자성을 또 다른 방식으로 개념화한다는 점에서 큰 한계가 있었고 이후 수정된 혹은 새롭게 정의된 페미니즘에서는 젠더적 정체성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한다는 점에 더 큰 주목을 하고 있다.
일례로 몇 해 전 방영된 한국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이 드라마에서는 단순히 여성 해방이나 근로자성, 소수자와 타자와의 연대를 이야기하는 데 머물러 있지 않다. 그보다는 매 순간 변모하고 진전하는 여성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의 연대와 연대의 가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돈, 섹스, 권력이라는 인류의 원죄적 속성과 맞물리면서 결과적으로는 단순히 여성의 이야기로 젠더 특수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로 보편화된다.
이렇게 페미니즘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고, 그것이 문화계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에 끼낀 영향력은 잠잠하면서도 파워풀하다. 그것은 페미니즘이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곧 틀렸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용인하는 사회를 지향하고, 그것을 통해 한 사회문화의 개방성과 다양성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단순히 급진적 여성주의나 남성 혐오 정도로만 폄훼되는 현상은 다소 위험하고 그러한 점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발전할 수 있었던 서양의 페미니즘과 달리 발전 동력을 압제당한 한국 페미니즘의 흐름은 매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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