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식 시인·문학평론가
시인은 한 권의 시집을 낼 때마다 산고의 고통을 겪는다. 노트북 앞에서 스스로 불행하고 고독한 자가 돼 현상을 들여다본다. 시의 목표는 랭보가 말한 것처럼 “미지의 세계에 도달함이며, 불가시적인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것”이다. 시인은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저주받은 자로 만든다. 이렇게 내면의 세계로 집중해 한 편의 시가 창작된다. 그런데 이런 시집을 정작 시인이 사서 읽지 않는다.
다수의 인천시인협회 회원들이 매년 시집을 발간한다. 작년 연말에는 동주문학상을 수상한 원도이 시인이 ‘토마토 파르티잔’을 출간했고 지난달에는 인시협의 원로 임경자 시인이 81세의 나이에 두 번째 시집 ‘어우렁그네’를 출간했다. 이달에는 이승예 시인이 ‘코드를 잡는 잠’으로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며칠 전 최휘 시인은 문학동네로부터 두 번째 동시집 출간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올해 문화재단 지원금에 선정돼 출간 준비 중인 시인이 여러 명이다. 이토록 힘들게 시집을 출간하는데도 시인들조차 시집을 직접 구매하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출간한 시집을 시인이 무료로 사인해 주는 문화 때문이다. 또 하나는 시인들 스스로 시집은 무료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이런 문화는 시인의 자존감을 크게 떨어뜨린다.
중견인 정진혁 시인이 어느 날 필자에게 “시집에 사인해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보낼 때 시인으로서 자괴감이 든다”며 우울하게 말했다. 산고의 고통을 겪으며 출간한 시집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을 스스로 부끄러워한 것이다. 또 어떤 시인은 정진혁 시인과는 상반되게 아는 시인이 시집을 발간했는데 자기에게 무료로 사인본을 주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불평했다. 필자는 아는 시인이 시집을 발간하면 가능한 한 구매해 읽는다. 특별한 경우는 수십권 구매해 학생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시집을 줄 때는 저자의 사인을 받아 소장 가치가 있도록 한다. 한 권의 시집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출간되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현재 인천시인협회에서는 시집 사서 읽기 운동을 시작했다. 뜻을 함께하는 시인들이 시집 사서 읽기 운동에 깊이 공감하고 앞장선 것이다. 그리고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시집을 사서 읽게끔 서로 독려하고 있다. 올해부터 시행하는 인시협상에 응모하려면 한 해 동안 발간된 회원의 저서 모두를 각각 한 권 이상씩 구입해야 한다. 필수 조건이므로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인시협상은 본상인 ‘오늘의시인상’과 작품상인 ‘인천시인상’이 있다. 두 상 모두 작품성을 평가해 회원들에게 수여하므로 명예롭다. 오늘의시인상은 문학적 성과가 높은 시인에게 수여하고 인천시인상은 한 해 동안 발간된 시집을 심사 대상으로 삼는다.
시집 한 권의 가격은 한 끼 식사나 차 한 잔 정도인 대략 1만2천원이다. 시집은 가격에 비해 읽어서 얻는 효용가치가 매우 높다. 한 시인의 시적 세계에서 사고의 지평이 끝없이 넓혀지기 때문이다. 또 고립되고 파편화된 현대인의 초상을 발견할 수 있다. 시 한 편마다 삶을 성찰하는 예술적 아포리즘이 가득하다. 이런데도 시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시집을 사서 읽지 않는다. 문화강국답게 시인 모두 시집을 사서 읽는 습관을 들였으면 좋겠다. 한 끼 식사는 몇 시간의 포만감에 그치지만 잘 쓴 한 권의 시집은 평생 정신적 포만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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