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석벽·사라진 포좌… 강화돈대 폐허 전락 [강화돈대를 지켜라①]

섬 둘레 아우르는 세계 유일 성채... 표지판 없고 잡초 무성 관리 안돼 
강화 지역 54곳 중 복원 9곳 뿐... 풍화·침식으로 돌무더기로 남기도
“郡·국가유산청, 보전·복원 나서야”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알려진 인천 강화도의 대표 역사문화유산은 돈대(墩臺)이다. 하나의 섬 둘레를 별자리처럼 아우른 성채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강화돈대는 외세 침입에 맞선 최일선 군사 방어 기지의 역할을 했다. 또 당대 최고의 축성술과 고유한 군사전략으로 세운 호국의 징표이자 예술 작품이다. 돌로 쌓은 돈대의 안팎은 자연친화적인 조선의 감성과 미학이 스며 있다.

 

하지만 이 돈대들을 주목하는 이들은 드물다. 대다수 시민들에겐 ‘돈대’라는 이름조차 낯설다. 이렇다보니 강화돈대는 제대로 역사문화유산으로서 보존·관리조차 이뤄지지 않으면서 폐허로 전락하고 있다. 본보는 강화돈대의 현 실태와 역사적 의미와 가치, 그리고 복원과 활용 방안 등을 3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주

 

1860년대 열강과 외세의 침략을 최일선에서 막아섰던 호국의 현장인 인천 강화군 초지돈대 전경. 조병석 기자
1860년대 열강과 외세의 침략을 최일선에서 막아섰던 호국의 현장인 인천 강화군 초지돈대 전경. 조병석 기자

 

외세침략 항전의 역사, 강화돈대를 지켜라①


 

인천 강화군 남단의 초지진은 조선이 서양 함대의 침략에 대응한 최일선 방어기지 역할을 했다. 1860년대 중반 이후 이양선의 출몰과 함께 초지진은 열강과의 공방전으로 포연이 걷힐 겨를이 없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일본 군함 운요호의 불법 침입 때도 첫 포성이 울린 곳이 초지돈대다. 초지돈대 옆 노송과 성벽에는 지금도 당시의 상흔이 남아있다.

 

인근 손돌목돈대와 용두돈대는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의 강력한 화력에 온몸으로 맞섰다. 어재연 장군 형제와 수백명의 조선 수비군 전원이 장렬히 산화한 호국의 현장이다.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에 서늘한 공포를 느낀 미군이 ‘전투에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졌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철군하기도 했다.

 

이 같은 강화돈대는 병자호란 때 청군에 함락 당한 참담한 교훈에서 비롯했다. 강화돈대는 숙종이 1만6천여 명의 인력을 동원해 80일 만에 완성했다. 엄청난 돌과 운송 선박, 갯벌 이동용 잡목, 생칡도 필요했다. 오로지 호국의 의지로 국력을 결집한 강화도 국방의 신기원이었다. 돈대 전문가들은 “섬 하나를 요새화하기 위해 해안선 전체를 돈대로 엮은 것은 세계적으로도 강화도밖에 없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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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인천 강화군 내가면 석간돈대가 오랫동안 방치된 채 잡초만 무성해 성벽의 형체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강화도 내 54곳의 돈대 중 38곳이 폐허로 방치돼 있다. 조병석기자

 

강화돈대를 놓고 ‘강화도사(史)’를 펴낸 이경수 역사학자는 ‘강화도 국방 문화재의 꽃’이라고 평가했다. 또 ‘강화돈대 순례’를 쓴 이광식 작가는 “강화돈대는 채석과 운반 그리고 축성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조선인 근육의 힘으로 세운 국방 역사였다”라고 전했다.

 

특히 강화돈대는 하나같이 수려한 경관 속에 있어 계룡돈대, 북일곶돈대 등은 일몰의 명소이기도 하다.

 

또 돈대마다 저마다 독특한 개성미를 지니고 있다. 대다수의 돈대가 원형이나 사각형이지만, 강화의 분오리돈대는 초승달 모양이다. 굴암돈대는 뒷면은 직선인데 앞쪽은 반원형이다. 용두돈대는 이름 그대로 용머리 형상이다.

 

여기에 울퉁불퉁한 돌을 깎아 밀착시킨 축성 기법 ‘그랭이질’과 함께 빗물 흐름을 방지하기 위한 눈썹돌, 무지개 형상의 홍예문도 특징이다.

 

돈대 전문가들은 “단시간에 작은 성곽 48개를 완공한 것도 대단하지만, 돈대의 압도적 관측 지점을 찾아낸 것도 놀라운 안목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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